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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진섭교수 | 한국 교회 갱신의 관점에서 본 루터 사상의 몇 가지 특징들 11 2019-06-21 08: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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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한 사람은 스스로 율법을 쓴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 따라 열매를 맺는 것처럼(시 1), 시간, 장소, 대상을 가리지 않고 선을 행한다. 루터는 ‘선행이 선한 사람을 만든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관을 맞서 성경의 이미지를 즐겨 사용한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 7:18. 눅 6:43). 믿음이 좋은 나무를 만든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사람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선행을 행한다. 그는 이 질문을 듣는다: “당신은 아무 것도 할 필요가 없게 된 마당에 이제 무엇을 하시렵니까?” 자유는 본질상 강제할 수 없다. 사람이 자유해야(must) 한다는 말은 모순어법이다. 자유만이 자신의 변호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섬김의 두 명제는 두 종류의 의의 구분에 상응한다.

 

9. 두 종류의 의
어떤 학자는 ‘율법과 복음’을, 어떤 학자는 ‘두 종류의 의’를 루터 신학의 핵심으로 간주한다. 둘 다 루터의 발언에 기초를 둔다. 루터는 두 종류의 의의 틀을 갖고서 자신의 피조물에게 수동적 의를 주시는 창조주와 이에 믿음과 신뢰로 응답하는 인간 피조물간의 관계의 성격을 명확히 했다. 하나님은 처음에는 창조에서 다음에는 구속에서 수동적 의를 주시는데, 이는 창조적이고 재창조적인 말씀을 통해 일어난다. 루터는 두 종류의 의의 구별을 통해, 하나님 앞 칭의의 기초로서의 인간 행위를 제거함으로써 복음을 극찬할 수 있었다. 동시에, 이 구별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분명히 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인류 공동체의 웰빙을 위한 능동적 의의 삶을 살도록 그를 이 세상 안에 넣으셨다.


두 종류의 의는 서로 나뉠 수 없다. 믿음의 수동적 의는 인간의 핵심적인 정체성을 세운다. 사랑의 능동적 의는 이 정체성으로부터 나와 세상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이 틀은 인간의 존재를 일차원적으로 간주하려는 유혹을 물리칠 수 있는 불가결의 도구다. 일차원적인 왜곡은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의 칭의의 기초가 될 때 발생한다. 또한, “믿음만으로”가 인간의 행위를 아무 상관없고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발생한다. 이 두 가지 왜곡에 대해 두 종류의 의는 인간 존재에 있어 두 개의 동시적이면서 구별되는 각각의 차원들을 확인할 수 있게 --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와 타협하지 않고 -- 해준다.


루터는 중세 교회가 두 종류의 의를 구별하는데 실패했다고 보았다. 중세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의 궁극적인 의미를 인간의 의에 부여함으로써 둘을 혼동했다. 믿음이 구원에 있어 또한 우리의 하나님 관계에 있어 불충분하다고 폄하했다. 그러나 능동적 의는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의의 기초가 될 수 없다. 행위를 하나님의 현존 안으로 들여놓으려는 시도는 창조주-피조물 관계를 거부하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과 생명을 순전한 선물로 받는다. 하늘의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모든 행위를 땅 위에 둬야하며 그리스도의 의만을 추구해야 한다. 이 의는 믿음으로 받는다. 능동적 의는 땅위에, 우리의 동료 인간 피조물의 관계들 속에 남겨둬야 한다. 중세교회는 두 종류의 의를 섞음으로써 혹은 어느 하나를 다른 것 속으로 붕괴시킴으로써 결국 구원의 기반을 약화시켰고 이웃을 저버렸다.  <계속>

 


엄진섭 박사
(전 루터대 교수,
현 한국루터 연구센터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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