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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돈목사 | 미국의 역사와 전통을 만들어낸 사람들 33 2019-11-08 09:4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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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대 대통령
마틴 밴 뷰런(Martin Van Buren) 2

 

밴 뷰런은 ‘가난은 죄가 아니라 불운한 운명을 타고 난 것뿐이다’라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빚으로 감옥가는 것을 막으려 노력했다. 밴 뷰런은 대화를 잘 이끄는 명석한 사람이었으나 정치에 관한 한 자신의 의견을 잘 드러내지 않고 대부분 들어주는 편이었다. 밴 뷰런은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는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잭슨이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확실한 심증을 가지고, 그를 돕기 위해 국회의원으로서의 임기를 마치기 전 사임한 후 뉴욕주의 주지사로 출마하여 주지사로서 잭슨을 적극 지지하여, 잭슨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 큰 몫을 했다. 그 결과 잭슨은 다음 대통령으로 가는 징검다리 자리인 국무 장관 자리에 밴 뷰런을 지명했다.


밴 뷰런은 국무장관으로서 영국과 협약하여 서인도 제도 사람들과 상호 무역의 문을 열었다. 또한 전쟁 당시 프랑스가 미국으로 들어오는 운송을 궤멸시킨 것들에 대한 보상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또한 켄터키 주 자체 내에 있는 길을 닦는 데 연방정부에게 재정을 부담 요청했으나, 밴 뷰런이 문서를 작성하여 그 일은 개별주의 책임이라는 것을 확실히 하고, 잭슨이 거부권(veto)을 행사하도록 도왔다. 잭슨은 시간이 갈수록 밴 뷰런을 더 신임하게 되었고, 잭슨의 부통령이었던 존 C. 칼훈은 밴 뷰런과 세력 다툼을 하게 되었다. 잭슨의 첫번째 임기를 마칠 즈음하여 그는 각료들을 전격적으로 쇄신한다는 이미지를 국민과 그의 행정부 내에 다 알리기를 원했다. 이때 밴 뷰런은 잭슨의 이런 이미지 쇄신을 위해 가장 중요한 자리였던 국무장관직을 스스로 사임했고, 잭슨은 그를 영국 대사로 임명했다. 밴 뷰런은 국회의 청문회에 비준을 받아야 했는데, 국회에서 투표결과 찬반이 반반으로 나뉘어, 부통령 칼훈의 표가 이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물론 칼훈은 정적인 밴 뷰런의 임명을 무효가 되도록 했다. 잭슨은 밴 뷰런이 사임한 이후 그의 각료들 전원에게 사표를 요구했었다. 그러나 잭슨은 1832년 선거에 밴 뷰런을 그의 부통령으로 지명했다.


많은 비난에도 불구하고 잭슨은 여전히 미국민들에게 인기가 많았고, 밴 뷰런은 잭슨을 이어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밴 뷰런은 당선되자 곧 그의 취임 연설에서 잭슨의 정책들을 그대로 유지할 것과 대부분의 잭슨 각료들을 그대로 둘 것을 발표했다. 잭슨 대통령 시절 경제적인 발전을 누렸던 미국은 1837년 지독한 경제공황으로 경제가 곤두박질쳤고, 밴 뷰런의 인기도 함께 땅에 떨어졌다. 사업체들이 파산을 선고하고, 사람들은 직장을 잃고, 은행들은 문을 닫았다. 밴 뷰런은 해결책의 하나로 독립적인 은행 체계를 만들어 그들이 연방정부 자금을 규제하는 것을 제안했고, 1840년 독립적인 국고 체계가 승인되었다. 이런 연방은행 체계는 1913년 우드로우 윌슨 대통령 행정부 기간에 연방 비축제가 설립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밴 뷰런이 인기를 잃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고 갈등을 관리하는 외교정책을 쓰자, 미국민들의 열정이 전쟁을 선호하는 쪽으로 갔기 때문인데, 후에 그가 평화적으로 일을 해결했음에도 그의 인기는 다시 회복되지 않았다.

 

 


박용돈 목사

예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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