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닫기
뉴스등록
포토뉴스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맨위로
뉴스홈 > 커뮤니티 > 독자 Essay > 상세보기
실시간 키워드
프린트
제목
“나는 예수를 오해했다” 2018-07-06 09:14:15
작성인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마 5:17)
 


왜 예수님께서 이런 변명을 하셔야만 했을까요?  마태복음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에게 쓰여진 것인데, 그 유대인들이 예수를 율법 파괴자로 오해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파괴한다는 말인 즉, 그들 삶의 존재 이유를 흔들고 있다는 뜻인데요, 유대인들은 율법지킴에 목숨을 건 사람들입니다.  율법지킴은 그들의 존재이유이며, 삶의 목적이며, 가치이며, 자존심입니다.  박지성에게 축구를 뺀 인생을 논할 수 없듯이, 유대인에게 율법지킴을 뺀 삶은 무의미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30살의 목수가 나타나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고, 죄까지 사해준다고 말합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어기고 그 율법 해석의 범위를 인간 심연 본성의 범위까지 확대시켜 버립니다.  그러면서 하나님만이 사용하실 수 있는 단어인 ‘나는 - 이다 (에고 에이미)’, 예를들면 ‘나는 길이다’, ‘나는 진리이다’, 나는 빛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에게 굉장히 모욕적인 말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를 율법 파괴자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그렇게 오해했습니다.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는 거기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저를 포함한 우리 모두는 예수를 오해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내 삶의 가치를 부인시키기 위해 오시는 그 분을 우리는 파괴자로 오해합니다. 내가 원하는 삶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원망합니다. 나의 기도제목을 부인시키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뤄가시는 당신을 흘겨봅니다.

 


게임에 중독된 자녀의 게임기를 몰수해가는 부모를 쳐다보는 자녀의 눈빛에는 살기가 넘쳐납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거듭나면 안그럴까요? 사도 바울은 사도임에도 불구하고 ‘오호라 나는 곤고하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이 로마서 7장의 탄성이 거듭난 이후냐, 이전이냐는 여전히 신학적으로 논란의 대상이지만, 저는 거듭난 이후의 고백이라고 확신합니다.

 


고린도교회는 당시 우리가 그렇게 앙망하는 초대교회였음에도 불구하고 간음, 근친상간, 이혼, 무분별한 은사자랑 등의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일들이 교회 안에서 (밖이 아닙니다!)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완전한 부활체가 입혀지기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용서 받았지만, 죄인입니다. 이 땅에서 용서받은 죄인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나의 죄인됨을 배워야 할 사명이 남아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오늘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인생 파괴자로 오해하듯이, 그렇게 오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니라고 변명하기 전에, 우리 자신을 돌아봐야 합니다. 우리는 삶의 치열한 고난의 현장에서 날마다 감사하며 살고 있는가? 입으로 하는 것 말고, 심령 중심에서 고난의 현장에서 감사가 먼저 터져 나오는가? 만약 지금까지 그렇게 살으셨다면 여러분은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사실 이유가 없습니다.

 


여러분 말이 진실이라면 하나님은 엘리야를 데려가시듯이 여러분을 사망도 보게 하지 않고 천국으로 데려가실 것입니다. 왜냐면 더 이상 인생을 살 이유가 없기 때문이지요. 아닙니다. 그건 우리가 착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어떤 중심이냐면, 하나님과 같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따 먹었을 때의 그 하와의 마음 속 말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그 중심 말입니다. 그런 우리 죄인들은 비록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의 땅의 보물들을 거두어 가시는 하나님을 반드시 오해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주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완전케(헬라어-플레로사이)라는 단어는 원어적 의미가 ‘꽉 차게 채우다’라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모두 하나하나 지키러 왔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분 자체가 율법의 원형이요, 완성이며, 교회들에게의 율법지킴 요구를 성자가 성육신하셔서,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전케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요구를 채우셨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요구가 무엇인가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대하여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사랑을 지키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이웃인 우리 교회 사랑을 이뤄내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율법 완성의 주인공이 우리 자신이 되야하는데, 십자가에 달리신 약자의 처절한 모습으로 오신 예수가 주인공이 되니, 죄인들은 그게 기분이 나쁜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주인공이 아님을 우리가 만나는 모든 순간에서 깨달아야 하는데, 그것이 힘든 것이죠. 한번 알고 그치는게 아니라, 매 번 가족을 통해, 친구를 통해, 자녀를 통해, 일을 통해 겪어내야 하니까 그게 힘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잘 안다고 말하지만, 사실 매일마다 오해합니다. 내 인생의 파괴자, 내 비전을 꺽어내려는 무법자로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때마다 기억해내야 합니다.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이 예수님의 호소를 말입니다. 십자가 위에서 오해하는 날 위해서 양 손과 발에서 피를 쏟으며,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며 ‘다 이루었다!’를 외쳐내신 그 예수가 지금도 당신을 오해하는 우리 죄인들에게 그렇게 호소하고 계십니다.

 

 

 

 

 

 

 

 

 

 

 

 

 

 

 

 

 

패스워드 패스워드를 입력하세요.
도배방지키
 57247096   보이는 도배방지키를 입력하세요.
추천 소스보기 답변 수정 삭제 목록
이전글 : “오늘도 승리했다” (2018-06-29 21:52:10)
다음글 : 이렇게 늘어나는 흰머리 (2018-07-06 09:2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