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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너도 한번 당해봐” 2019-10-04 08:28: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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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2주기가 다가온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눈에 밟히는 아내를 감당 할 수 없어 하루에도 몇 번씩 울먹거렸다고 한다”

 

 

 

복지관을 드나들며 80대 어르신과 흉허물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는 아내를 먼저 보내고 2주기가 다가온다고 한다. 가는 곳마다 눈에 밟히는 아내를 감당할 수 없어 하루에도 몇 번씩 울먹거렸다고 한다. 자주 갔던 식당에 들리면 그곳에 아내와 함께 식사하던 자리가 빤히 보이고 백화점에 가면 아내가 자주 만지작거리던 옷이며 소품들이 자꾸만 눈에 파고들어 견딜 수 없다고 한다.


살 만큼 살았고, 온갖 세상사를 다 겪어 온 그가 아내를 그토록 잊지 못하고 몸살을 하다니 그에게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도 무색할 뿐이 아닌가 싶다.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을 수가 없어. 이제 내 몸까지 하루가 다르게 망가지고 있어. 암으로 입원한지 10개월 만에 한마디 유언도 못하고 홀연히 떠났어. 망각이 축복이라는 말을 수없이 되씹으며 자신을 다독거리지만 소용없어. 어제 일처럼 눈에 선한걸 어떻하지!”


만날 때마다 울먹거리는 그 어르신과 눈 맞춤하기도 힘들고 또 무어라 할 말도 없다. 그냥 그의 손을 꼭 잡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소곳이 그의 푸념을 경청하는 도리 밖에 더 있는가.


우리사회는 생명의 한 존재를 이해함에 있어 보통 그 사람의 공과(功過)를 따져 경중을 가리는 방식에 익숙해져있다. 신문 방송에서 요란하게 주목 받는 사람의 죽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죽음이 그렇지 않은가.


우리 사회는 한 생명의 죽음을 그렇게 차별하고 비교하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다. 이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목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한 영혼의 가치를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나도 그 어르신이 말씀하시는 사별의 아픔을 내 살붙이처럼 느끼지 못하는 것이 자못 부끄럽기 짝이 없다.


망자의 학력과 그가 소유한 경제적 가치나 명예, 권력과 사회적 기여를 따지기에 앞서 그가 누구에게 사랑을 받고 누구를 사랑했으며,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생각할 때 어찌 죽음에 경중이 있겠는가. 죽음은 누구에게나 평등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심리학자들의 실험과 연구 발표에 의하면 사별의 감정과 아픔을 정리하거나 처리 하지 않고 억압하면 그 트라우마가 면역체에 심각한 악영향을 주어 정서적, 심리적 문제 뿐 만 아니라 육체적 질병까지 초래 한다고 한다.


그 어르신은 사남매를 두었다. 자녀들이 아버지를 극진하게 모셨고 산해진미로 끼니를 이어가도록 보살폈으나 하루가 다르게 쇠잔해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아내를 잊지 못하는 그리움의 아픔이 얼마나 큰 고통인가를 실감한다.


사별의 상처는 그리 쉽사리 잊혀지지 않아 십 년이 지나고도 어제의 일처럼 울컥했다는 이웃 할머니의 간증을 접하기도 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사별·애도 전문상담자는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라고 외치고 싶었던 이발사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소리치고 애도의 눈물을 쏟아 내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한다. 누르면 누를수록 풍선처럼 터져 극한의 상황에 이를 수도 있다고 일러준다.


사람들은 사별자의 아픔을 위로 한다는 명분아래 온갖 권면과 충고를 아끼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당사자는 자기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아닌 것은 이를 평가절하 하면서 분노까지 느낀다고 하니 매우 조심스럽지 않을 수 없다.


그 어르신을 자주 찾아오는 친지들의 권면과 위로의 온갖 처방을 그는 수용하지 못하고 내심 분통을 터뜨렸다고 고백했다. “그래, 잘났다. 너도 한번 당해 봐라. 그때 내 마음을 알거다!”라고.


장례식장에서 유족에게 “산 사람은 살아야지 어쩌겠는가!”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된다. 맞는 말이다. 이에 아무도 토를 달수 없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끔찍한 병고 과정을 함께 했고, 끝내 죽음을 지켜 보아야만했던 일이 어제인데 어찌 이해가 되겠는가. “표현된 슬픔과 고통은 더이상 고통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눈물로 지워지지 않는 슬픔은 없다.”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 어르신은 이따금 ‘욱’하고 치미는 분노를 참을 수 없다고 한다.

“하필이면 왜? 내게 이런 일이!”라는 분노가 치솟아 오르는 하루 해는 짧기만 하다고 한다. 그는 슬픔과 고통 속에서도 신앙으로 위로와 평안을 누리고 싶었으나 하나님은 끝내 침묵하셨다고 한다. 욥이라는 사람은 극한의 고통 중에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는가.


그 어르신도 고통 속에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은혜와 감사를 체험하기 바라며 간절히 기도 할 수밖에 더 있는가. 그 어르신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터널 속에서 절망하고 있으나 세월과 함께 언젠가는 주안에서 자유로운 삶을 누리리라고 확신한다. 끝이 없는 인생의 터널은 없기 때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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