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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근 목사 회고록 18 | 정치경제 토론대회 2021-07-30 14: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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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활 3년차에 접어들면서 서울사대 캠퍼스에 내 이름이 더 많이 알려졌다. 학년대표를 2년 연속으로 했던 것도, 기독학생회 활동에 열심을 냈던 것도, 대학신문에 글을 쓴 것도 모두 내 이름을 알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체육학과의 교수 한 분은 <한국체육사> 저술의 원고교정 작업을 내게 맡겨주셨다. 전공과목 교수께서는 <한국연극사> 저술의 자료정리를 돕는 일을 맡겨주셨다. 서울사대 안에서 내 이름이 뭐 크게 유명해진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꽤 알려지게 되었다.

 

한 번은 체육과의 이완섭이라는 친구가 나를 만나서 무슨 토론대회에 함께 나가자고 했다. 기독학생회 친구였다. 경희대학교 정경학부 주최로 전국대학생 정치경제토론대회를 서울시청 옆에 있는 옛날 국회의사당 자리에서 개최한다는 것이다. 자기는 발표자로 나갈 계획인데 질문자로 나를 선정했단다. 말하자면 ‘우정출연’이었다.

 

그의 발표주제는 <농어촌 경제개발론>이었다. 그의 체육전공과 별로 관련 없는 주제였다. 앞으로 그의 고향에서 국회의원이라도 나갈 생각을 가진 것 같았다. 4.19혁명이 지나 한국사회가 극도의 혼란이 있었고, 그것을 이유로 5.16군사혁명이 진행 중인 때였다. 아무려나, 그나 나나 전공과는 별로 관련이 없는 주제들이었다. 

아무튼 토론대회 현장에 갔다. 군사정부가 국회를 해산하기 전까지는 국회의사당으로 사용했던 역사적 건물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다. 앞줄에 앉아서 토론대회 발제자들의 의견을 듣고 일차적으로는 자기와 짝이 된 발제자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 질문자의 기본 역할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종합토의를 할 때에는 자유롭게 모든 발표자에게 질문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국회의사당 건물의 겉모습은 매우 낯이 익었다.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도 자주 보아왔지만 특히 4·19혁명 때에는 그 앞에서 연좌데모를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군사정부 치하여서 국회는 해산된 상태였다. 

우선 시골 무지렁이가 그 역사적 건물 안에 들어가 볼 수 있다는 것에 어떤 자부심을 느끼기도 했다. 첫 국회가 열렸을 때에 첫 의장이었던 이승만 박사가 당시 국회의원 이윤영 목사에게 개회기도를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이미 들어 알고 있었다. 아무튼 역사의 현장을 체험하면서 전공인 국어교육과는 별 관련이 없는 정치경제를 주제로 토론을 한다는 것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꼈다.

 

토론자 좌석에 앉으면서 잠시 눈을 감고, “주님, 알곡 토론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확신에 마음이 이상스럽게 평안해 졌다.

전국 각 대학교에서 출전해온 발표자와 토론자들이 연단에 올라가서 열심히 발표하고 뜨거운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의 발표내용과 질문 내용의 허점이 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나는 그것들을 메모해 나갔다. 발표자는 15분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고 질문자에게는 7분을 넘어서는 안 되었다. 매우 짧은 시간이지만 연설자에게는 상당히 긴 시간이었다.

 

나는 나보다 앞서서 발표한 모든 내용들을 간단히 요약하면서 그 허점들을 언급했다. 그리고 나와 함께 갔던 발표자의 내용을 요약하여 정리하면서 장점과 단점을 평가해 나갔다. 이미 교육평가론 등을 공부했던 터였다. 특히 농어촌경제는 그 경제주체되는 농민과 어민들의 동기유발 곧 경제문제를 해결해야 하겠다는 의욕을 높여 주는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것이 덴마크가 달가스 등을 중심으로 이룩한 성공모델 아니겠느냐고 제시했다. 그러면서 주제발표자는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몰라서 질문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제시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질문한 것이 참가자들과 특히 심사위원들의 주목을 끌었다.

 

토론대회가 마감된 후에 시상식이 있었다. 나는 질문상으로 <서울대학교 총장상>을 받았다. 역시 질문만 한 것이 아니고 대안을 제시하고 발표내용에 대한 평가를 했다는 것이 돋보였고 다른 토론자에게서 찾기 어려운 독특한 모습이었다고 심사위원장이 평가해 주었다.

 

이런 내용이 신문 방송 등의 언론을 통하여 전국에 확산되었다. 그래서 내 이름이 또 한 번 전국에 알려졌다. 누구보다도 나의 고향 경기도 화성군 출신 정치인들 눈에 뜨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최측에서는 나중에 또 연락이 왔다. 내가 서울대학교 총장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보다 한 등급 더 높은 법무장관상 수상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상장과 상패를 다시 수여하도록 조치하겠단다.

 

그러나 나는 응하지 않았다. 내게는 모교인 <서울대학교 총장상>이 훨씬 더 명예롭다고 했다. 그 상패를 오랫동안 간수해 오다가 미국 이민 오는 과정에서 잃어버렸다. 무척 아쉬운 일이다. 내가 그 시절 전국대학생 가운데 알곡학생이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토론대회 경력은 후일 내 고향출신 국회의원이 나를 비서로 임용하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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