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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목사 | 기독교 신앙을 방어하라 87 2019-01-11 21:4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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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증명으로서의 변증학: 하나님의 존재

3. 형이상학적 논쟁 (Metaphysical Argument) (계속)

 

존재: 존재론적 논쟁 (Being: The Ontological Argument) (계속)

플라톤의 완벽한 삼각형에 대한 생각은 사실론에 있다고 생각되는 어떤 실재에 대한 응답인 것이다. 그에게 파란색, 빨간색, 용기, 지혜, 인간, 그리고 최고의 형태인 선(goodness)에 대한 형태는 같은 진리인 것이다(AGG, 116). 이것을 볼 때에 플라톤의 추론은 도덕 논쟁의 하나로 생각된다. 물론 플라톤은 성경의 하나님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았으며 비인격적 형태의 다수성(plurality)에 대하여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성경은 도덕 가치의 근원은 오직 하나이며 인격적이신 하나님이심을 강조한다(ibid.). 안셈(Anselm)은 모든 완전함의 근원인 존재는 전적으로 완전함을 가진 존재임을 가르쳤다(ibid.). 존재론적 논쟁에 있어서 주요한 용어는 “완전함”이다. “완전함”이란 우리들이 알고 있는 가치의 체계를 전제로 한다.


어떤 사람들은 ‘존재는 완전한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 문제에 대하여 칸트(Kant)는 “존재는 술어가 아니다(Existence is not a predicate)”라고 했다. 이 의미는 한 물체에 대한 개념에 어떤 것도 첨가되지 않는 존재는 “진성한 술어(real predicate)”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 실체(entity)의 “술어”는 속성(예, 크다)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불사조(phoenix)”의 존재는 허구적이며 또는 신비적과 같은 술부(a predicate)가 없이 적절하게 정의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무(nothingness)”의 형태로 설명되는 “니르바나(Nirvana)”가 있고 고해가 있는 생(life)을 가르치는 불교에는 완전함이 있다고는 하지 않는다(ibid., 117).


기독교가 가진 완전함에 대하여는 어떠한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만드신 만물을 보시고 “좋으셨다(good)”고 선언하셨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인간의 술부가 제시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속성이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원래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성경은 그 하나님을 말씀한다. 그러므로 기독교에는 완전함이 있다. 창세기 1:31은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 디모데전서 4:4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라고 선언하신다. 그러므로 기독교에는 완전함이 있다(ibid.).


이와 같은 견지에서 볼 때에 존재론적 논쟁이 성경이 가르치는 존재에 대한 크리스찬 견해와 가치를 전제하는 한 존재론적 논쟁은 성경적 하나님을 증명한다(ibid.). 그러므로 크리스천들에게는 성경이 가르치는 하나님에 대한 내용을 성경이 아닌 가치와 교체하게 된다. 그때에 성경이 가르치는 것을 채택하게 된다. 성경에 기인된 존재론적 논쟁은 수많은 비성경적인 신에 대한 사상으로부터 참된 진리를 방어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의 다신론적(polytheistic) 신, 파르메니데스와 스피노자와 헤겔의 범신론적(pantheistic) 신, 그리고 하트숀(Hartshorne)의 과정의 신, 그리고 라이프니쯔(Leibniz)의 궁극적인 실체인 모나드(monadic)는 성경의 하나님은 아니다. 이것들과는 달리  안셈과 플란팅가의 존재론적 논쟁은 성경의 하나님을 증명한다(ibid.).


특별히 안셈은 기독교 전제론자(presuppositionalist)로써 성경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대하여 추론하는 방법을 찾았다. 그는 확실하게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는 실제로 의심하지 않았다. 그에게 하나님은 마음으로 믿고 사랑하는 하나님이셨다. 그가 발견한 하나님의 존재의 증명에 대한 진술은 그의 독창적인 것이었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나는 믿는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을 나는 이해한다(not to understand, that I may believe, but to believe, that I might understand)”(credo ut intelligam)(ibid.). 안셈에게 믿음 (faith)은 이해를 위한 근거(basis) 였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 증명에 대하여 가우닐로(Gaunilo)와의 대화에서도 가우닐로의 “믿음과 양심”에 호소하였던 것이었다.


죠 카터(Joe Carter)는 “양심 (conscience)”을 우리들의 가치 체계에 대한 증거를 가진 내적 합리적 능력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면 양심의 내적 합리적 능력의 구성에 대한 성경적 정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하나님의 사실(facts)이며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였을 때에 신앙의 지식을 구성하며 그것은 윤리의 기준이 된다. 그 지식은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난 이성의 사고의 과정으로써 양심의 판단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신앙은 이성의 앞에 위치한다. 그리고 기독인들의 사고에 있어 믿음으로 받아들인 성경의 지식은 신자에게 진리 지식을 구성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행함에 대한 판단과 해석과 행함의 전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근거된 존재론적 논쟁은 크리스천 전제적 논쟁이 되는 것이다.

<계속>

 


이동희 목사
 뷸라하이츠 대학 교수
The Hodos For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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