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 때문에 공관복음(共觀福音)은 물론 요한복음에 있어서도 말씀으로 자기를 메시아라고 선포하기보다는 여러 비유로 가르치게 하시고, 이적으로 사람들의 굳은 마음의 바위를 깨뜨리는 일 등으로 하나님의 뜻과 자기를 계시하셨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어느 정도 깨닫고 예수의 정체를 인식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른 사람들(제자들)과 또 예수의 정체를 알아도 자신의 구속 사업에 방해가 되지 않을 사람(사마리아 여인 같은 사람)들에게는 솔직히 자기를 메시아라고 들어낸 일도 있다. 그러나 그는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시인하신 연후에도 그들에게 엄히 명하시며 그것을 비밀에 붙여 두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서도 제자들은 아직 예수의 메시아 직을 완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자리다툼을 하였고, 가룟 유다는 마침내 실망하고 예수를 팔기까지 하였다. 하물며 일반 백성이야 말할 것이 무엇이랴! 예루살렘 입성에 호산나를 부르며 환호하던 그들의 머리에도 아직 예수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없었다. 그들은 삽시간에 예수를 십자가에 달게 해달라고 호소하는 반역의 무리로 화하였으니 말이다. 그런 무리들 앞에서 예수님이 자기를 메시아라고 말할 도리가 없었다.

예수님이 대제사장 앞에 끌려 오셔서 신문을 받으실 때, “당신이 메시아요?”하고 묻자 그 물음에 대하여 마가복음에는 “그렇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당신이 말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묘하게 대답을 회피하시고 “그러면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하고 재차 물었을 때 “내가 그라는 것을 당신들이 말하고 있소”라고 했으며, 요한복음에는 그 질문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것을 종합해 볼 때 예수님은 질문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묵인하는 것으로 들리고,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정도로 버려두는 것도 같다. 빌라도의 질문에 대한 예수의 답변도 마찬가지이다. “당신이 유대인의 왕입니까?”하고 물었을 때 “당신이 말하였소”(The words are yours: NEB)라는 간단한 말로 긍정도 부정도 아닌 말씀을 하셨다.

예수의 생애에는 이와 같이 이상한 모순이 끝까지 계속되었다. 자기를 메시아로 계시해야 하며 또는 가능한 한도에서 또는 가능한 방법 내에서 그것을 계시하시면서도 일반 사람들에게 자기의 메시아 됨을 말씀하지 않으셨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의 메시아 직에 대한 보다 포괄적인 인식은 부활 승천 이후, 아니 오순절 이후에 이루어진 것이다. 제자들까지라도 예수님이 부활하시기 전까지는 그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였었다. 예수님은 물론 살아있는 동안 그의 제자들이나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바로 인식해 주기를 바랐을 것이지만, 그의 계시가 보통 사람에게 납득될 수 없는 것임을 자인하신 것도 사실이다(요 8:43). 예수님은 자기가 부활 후에 모든 것이 밝혀지고 또 성령이 오셔서 가르쳐 주시고 기억나게 해 줄 것을 약속하며 사람들이 그를 메시아로 믿을 수 있으리만큼 넉넉한 증거들을 살아있는 동안에 행하시고, 부활이라는 놀라운 태양 같은 밝은 사실로써 증거의 절정을 삼으신 것이다. 예수님은 부활하시기 전에는 사실 한 사람도 메시아를 바로 인식한 사람이 없었고,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을 공공연히 들어내지 않으셨다고 해서 그의 메시아 직(職)을 완수하시지 못 한 것이 아니다. 그는 그렇게 자기를 감추시는 수단을 통해서 그가 미리 작정하신 때까지 무사히 도달한 것이었고, 인류구원의 대 사업을 성공적으로 성취하실 수 있었던 것이다.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자기를 의심하는 세례 요한에게 “가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시오”하고 말하여 요한의 제자들을 돌려보내셨다. 말로써 자기를 그리스도니 아니니 하는 것보다 그 열매를 보아 알라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자기를 나타내셨다. <계속>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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