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문제는 예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남에게 섬김을 받으려하시지 않고 남을 섬기려 하실 때, 또 자기를 공공연히 메시아라고 말씀하시기를 삼가시는 입장에서 그의 태도는 사람 앞에서 어떠하였으며, 만일 그 사회가 우리 한국의 사회라고 가정한다면 예수께서 어떤 언어를 사용하셨을 것인가? 나는 이 한 가지를 증명하기 위하여 위에 구구한 서론을 늘어놓은 것이다.

히브리어나 아람어에는 존대말의 구별이 없으니까 문제가 없지만, 우리 사회를 두고 말해본다면, 인간의 몸으로 끝까지 낮아지신 분으로서 인간이 쓰는 이상의 말을 쓰거나 인간 사회에서 가장 높은 말만을 사용하며, 그런 대우를 받으려 들었을 것인가? 그가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으니 우리와 같은 용어와 우리와 같은 평범한 말씀을 하심으로 그 동일성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여하간 성경 기록을 통하여 볼 때 그리스도의 말씀의 내용이 특이하며 권위가 있었고 그의 몸에서 우러나오는 능력이 특이한 것이었고 놀라운 것이었던 것이 사실이지만 그의 언어의 특성은 발견되지 않는다. 특히 기이한 것은 그가 부활하신 후에 하신 말씀을 검토해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도 부활 전의 말씀과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의 말씀이 우뢰(雨雷) 같거나 방언 같거나 불가사의의 것이 아니고 누구나 그를 믿는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보통 말이었고 평범한 말이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오랫동안 그들과 동행하며 그의 말을 듣고 대답하면서 그의 언어에서 아무런 특이성도 발견하지 못하였다. 오직 그의 교훈에 감명이 있었을 뿐이었다.


디베리아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일곱 제자의 경우에도 그렇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마리아가 만난 부활하신 예수의 말씀도 그러하였다. 그는 승천하시는 순간까지 사랑하는 제자들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에게 나타나실 때마다 여전히 부활 전과 같은 인간의 말로써 말씀하셨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의 말씀에서는 부활 전후를 막론하고 메시아 직을 감추신 보통 인간의 말씀을 사용하신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필자가 여기까지 예수의 메시아 은폐문제를 운운한 동기는 그의 말씀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하는데서 온 것이다. 그가 사용하신 언어 양식을 따져보려는 데서 그의 메시아 비밀 문제까지 언급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은 어디까지나 예수님을 거짓이 없이 드러내어 그를 바로 믿도록 하자는 데 있었다. 예수님을 사실대로 보여주지 못한다면 그것은 흐린 거울과 같아서 오히려 신앙생활에 손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지금까지의 성경이 예수님의 말씀을 옮길 때에 어떤 특정 계급의 독특한 분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 같은 감을 줄만큼 번역되었기 때문에 독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이 우리를 대속하시려고 우리 중의 하나와 같이 되셔서 맨 밑바닥까지 인생을 체험하셨다는 느낌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님을 그의 최후에 십자가를 지시는 특정 사실만을 통해서 구원하셨다는 그릇된 인상을 가지게 한 것이다. 사실은 예수가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 사는 그 생활 전체가 인간 구속에 불가결의 요소이며 십자가는 그 구속 사업의 절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생활 전체를 통한 구속이라는 철저한 사상은, 철두철미 하나님이 우리와 꼭 같은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그의 생활의 전면에 해당시킴으로써 가능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다. 오직 죄가 없는 것만 다르고 모든 면이 우리와 같으셨다고 본다면 그의 말씀하시는 생활에서도 우리와 다름이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들의 말과 같이 상대의 늙고, 젊거나, 많고, 적거나 하는 종류의 여부에 따라서 구별이 생기고 다양성을 띄게 된다는 말이다. <끝>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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