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4세기에 야만족을 무대에 올리신 것, 특히 로마라고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무대'에 올리신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라'는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 하나님이 구원하기로 작정하신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8세기에 바이킹들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는 유럽이라는 무대'에 올리신 것 역시 '보라'는 것이다.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신 '때가 무르익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백성들이 반응하지 않았다. 3세기부터 4세기까지 무려 백 년 동안 하나님께서 이들을 무대에 올리고 또 올리셨지만 거의 아무도 이들에게 가지 않았다. 그러자 결국 하나님께서 '비자발적 선교'를 결정하셨다. “그래? 너희가 정 가지 않겠다면, 내가 그들을 너희에게로 데려오겠다!” 그렇다. 선교에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가는 선교'와 아니면 '비자발적으로 그들이 오는 선교'다. 8세기 바이킹들 역시 교회가 '그 시대, 하나님이 작정하신 사람들'에게 가기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던 -비록 비자발적 선교의 모습이었지만- 종족이었다.

시대의 무대를 읽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 중요하다. 물론 모든 시대에 모든 민족을 선교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무대에 올리시는 민족이 있다면 이것은 좀 특별하다. 하나님의 역사에는 선교적 카이로스(때)가 있기에 무대에 반복적으로 올리시는 민족은 구원의 때가 임했음을 알리는 하나님의 사인이기 때문이다. 4세기에 로마교회가 '중국'으로 선교사를 보내지 않은 것과, 카이로스의 시기를 맞고 있는 '고트족을 비롯한 야만족 - 무대에 올라왔던 사람들'에게 선교사를 보내지 않은 것은 다른 문제였다. 후자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비자발적 선교'를 통해 복음을 전하게 되는 미래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5세기는 야만족들을 향한 하나님의 카이로스였다!

역사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역사를 움직이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렇기에 역사의 무대를 읽는 것은 선교와 깊게 연결되어 있다. 1990년대는 중앙아시아 선교의 카이로스였다. 왜냐하면 1992년에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되면서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등 소위 '스탄 국가들'이 독립하게 된다. 독립한 스탄 국가들은 경제적 위기와 함께 새로운 국가정체성의 필요를 절실히 느끼게 되는데, 이 틈을 타고 복음이 들어간 것이다! 역사는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교회는 하나님의 카이로스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짓는 중대한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21세기의 무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떨까? 하나님의 카이로스는 무엇을 가리키고 있을까? 혹시 역사의 무대 위에,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고 있고 보고 있는 무대 위에 반복적으로 올라오고 있는 사람들은 없는가? 지난 20년 동안 전 세계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던 사건들은 무엇이었나? 보이는 것이 없는가? 그렇다! 2001년 9·11을 시작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 걸프 전쟁, 오사마 빈라덴과 탈레반, 자스민 혁명, IS의 등장, 시리아 내전과 난민사태, 그로 인해 촉발된 영국의 브렉시트, 트럼프의 출현, 셰일가스의 등장과 유가하락, 그리고 빈 살만을 중심으로 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변화에 이르기까지. 모두 동일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아랍의 무슬림들이다. 하나님은 21세기 역사의 무대에 아랍 무슬림들을 올리고 계신다. 왜? 보라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보라'는 것이다. 지금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의 카이로스적인 구원이 임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말이다. 만약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역사가 대답한다. 비자발적 선교! 우리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다. 야만족이 로마의 안방을 점령했듯이, 바이킹이 유럽의 새로운 주인이 되었듯이, 우리 다음세대는 어쩌면 무슬림들이 우리 집 문 앞에까지 오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계속>

고성준 (한국 하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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