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는 언어적 장벽이다. 난민들의 숫자에 비하면 아랍어로 소통할 수 있는 선교사들의 숫자는 그리 많지 않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현지인 목사들도 흔치 않다. 그나마 페르시아어권은 이란 지하교회의 부흥과, 그리고 부흥하는 교회에 대한 정부의 핍박으로 인해, 이란 목회자들이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다. 세계 곳곳에서 이란 목사를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랍어권은 상황이 다르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사역자를 찾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아랍어를 사용하는 크리스천들로는 이집트의 콥틱 교회가 있다. 시리아 난민으로 야기된 거대한 복음의 기회 앞에서, 콥틱 교회에 대한 선교적 기대가 높아져 가고 있다.

그러나 콥틱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선 몇 가지 해결되어야 할 과제가 있다. 콥틱 교회는 '핍박을 견디는 것'에는 특화되어 있지만, 무슬림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개념 자체가 없다. 오랜 세월 이슬람과 공존하면서 암묵적으로 형성된 '약속'은 '서로를 건드리지 않는 것'이다. 기독교 커뮤니티 안에서는 무슨 일을 해도 오케이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모임에 무슬림을 초청한다든지,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이것은 콥틱 크리스천의 입장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금기다. 잘못하면 마을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콥틱 교인들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지키려는 열정이 있다. 그러나 이슬람 선교는 다른 이야기다. 또한 대부분이 사회 하층민들로 구성된 콥틱 크리스천들이 해외 비자를 받는 것 역시 녹녹치 않다.

이런 이유로 인해, 아랍어권 사역은 페르시아어권 사역보다 어렵다. 하나의 대안은 선교사들의 재배치인데 이것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중동의 선교사들을 유럽으로 재배치하는 것에는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유럽의 난민들은 현지적응에 대한 도움을 원하는데, 중동에서 유럽으로 재배치된 선교사는 선교사 자신도 현지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다. 언어부터 다시 배워야 하니 말이다. 그러니 난민들을 돕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아이러니한 것은, 언어의 문제는 시간의 문제와는 서로 상반되게 진행된다는 사실이다. 언어의 문제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시간이 흐르면 어찌되었던 난민들도 현지어를 배운다. 특히 아이들은 더욱 그렇다. 난민의 기성세대보다 아이들에게 집중한다면(집중해야 한다!), 언어의 문제는 결국 현지어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난민선교의 과제는 '이동'이다. 최종정착지로 목표한 곳이 아니라면 난민들은 계속 움직이려하기에 장기적인 사역에 어려움이 있다. 이동의 문제는 네트워크을 통해 협력함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3) 국가별 다양성
난민들에 대한 사역적 접근은 국가에 따라 매우 다르게 나타남으로, 일괄적 전략을 세우는 것은 조심해야 한다. 유럽만 해도, 난민들이 경유지로 생각하는 그리스와, 정착지로 생각하는 독일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중동에서도 레바논과 요르단의 상황이 다르고, 터키는 더욱 다르다.

어디서 난민을 섬길 것인가?
요즘은 한국에 들어오고 있는 예멘 난민들에 대해 묻는 분들이 많다. 이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의견은 둘로 나뉜다. 하나님이 주신 선교적 기회로 보고 난민들을 적극적으로 섬겨야 한다는 의견과, 무슬림들은 절대로 받으면 안된다고 하는 강경한 주장이다. 나는 이 두 주장의 장점들을 절충하고 싶은데, 그 의견은 이렇다. “교회가 난민을 환대하고 섬겨야 합니까?” 당연하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성경은 나그네를 환대하라고 했다. 당연히 제주도에 들어와 있는 예멘 난민들을 향해 교회는 따뜻한 환대의 손길을 펴야 한다. 최선을 다해 도와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난민들은 모두 한국으로 오라!”는 흐름의 메시지를 만드는 것과는 좀 구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고성준 목사
수원 하나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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