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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 14

William B. Scranton (스크랜턴) 선교사

박흥배 목사 | 등록일 2019년08월30일 09시27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William B. Scranton (스크랜턴) 선교사

William B. Scranton, May 29, 1856 – March 23, 1922 (Entering Korea in 1885)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는 어려서부터 이런 어머니에게 신앙적·사상적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윌리엄 스크랜턴 선교사는 처음부터 선교사를 목적한 것이 아니었다. 1878년에 예일 대학교를 졸업했고 뉴욕 의과대학에 진학, 1882년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그 해, 그는 룰리 암즈(Loulie W. Arms)와 결혼하였고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병원을 개업했다. 그러던 중 1884년 여름, 일본에 있던 감리교 선교사 매클레이(R. Maclay)를 통해 한국 정부가 병원과 학교 설립을 허락했다는 소식이 미국에 알려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 감리교회에서는 한국 선교를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되었고 선교사 물색에 나섰다. 그때 매클레이가 클리블랜드로 스크랜턴 가족을 만나러 왔다. 당시 상황을 스크랜턴 부인은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1884년쯤인가, 제 생각으론 매클레이 박사인 것 같은데, 선교사 한 분이 클리블랜드에 있는 어머님을 뵈러 왔습니다. 그는 홀에서 나를 만나서는 한국에 개신교 선교사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어 왔습니다. 나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습니다. 나는 해외선교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습니다. 국내 전도나 아메리카 토착민 선교에 관련해 조금 일을 하고 있을 뿐이며 국내 전도인들을 돕고 있는 정도였습니다. 내 대답은 ‘어이구머니! 안될 말이에요’였습니다. 그러자 그는 ‘그렇다면 가지 않는 게 좋겠군요’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결과는 달랐다. 스크랜턴 부인의 계속된 증언이다. “그 해 초여름, 스크랜턴 박사가 지독한 장티푸스 열병에 걸렸습니다. 그때 아이까지 심하게 앓고 있어 남편을 돌볼 틈이 없었고 어머님이 그를 간호하였습니다. 남편이 회복된 후 우리는 자동차로 드라이브를 나갔습니다. 그때 남편은 내게 놀라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자신은 중앙 아프리카를 제외한 어느 곳이든 선교사로 나가 자신을 헌신하기로 하였다고 밝히는 것이었습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나는 ‘당신이 가는 곳이라면 어디든 저도 가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한참 있은 후 ‘거기에 제 뼈를 묻겠어요’하였습니다. 나는 결혼하던 날 결심한 것 중의 하나가 무슨 일이 있어도 남편을 거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열병에 걸려 투병 생활을 하는 동안 스크랜턴은 선교사로 여생을 헌신할 것을 결심한 것으로 보이며, 그 과정에서 병간호를 맡았던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모자가 함께 선교사로 헌신할 결심을 한 것이다. 이러한 스크랜턴 선교사 모자의 병상 결심은 미감리회 해외선교부와 해외여선교회에 통보되었고 그에 따라 먼저 어머니 스크랜턴 대부인이 1884년 10월에, 아들 스크랜턴 선교사가 1884년 12월에 한국 선교사로 각각 임명받았다.

 


▲ 윌리엄 B, 스크랜턴 선교사 가족사진

 

 

아펜젤러 목사 부부·아내·어머니와 함께 1885년 2월 3일 출발, 인천에 도착했으나 갑신정변으로 조선 정국이 불안하여 잠시 일본 요코하마로 건너가 거기서 수신사 박영효에게서 한국 말을 공부하였다. 그 해 5월 3일 한국에 도착하였고 의사이자 장로교 선교사인 알렌 박사가 설립한 광혜원에서 6주간 근무한 후 정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여 1886년 병원을 세우고, 고종 황제로부터 ‘시병원’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의 어머니 스크랜턴(Scranton.M.F) 여사는 이 집에서 이화학당을 시작하였다.

 

1895년 콜레라가 유행하였을 때, 에비슨 박사와 함께 많은 환자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 후 감리교 선교부의 간부로 성서 한역 통일회 회장이 되어 성서 번역에도 힘썼다.

 

1907년 선교 정책을 둘러싸고 친일파인 해리스 감리교 감독과 의견 충돌을 일으켜 선교사직과 함께 감리교 목사직을 사임하고, 성공회로 교파를 옮겼으며, 평신도로서 서울과 평북 운산, 충남 직산, 중국 대련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1917년 일본 고베로 건너 간 후 1922년 별세하였다. 그는 고베의 로코산(六甲山)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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