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 Heron(헤론) 선교사 ①

John W. Heron, June 15, 1856 – July 26, 1856 (Entering Korea in 1885)

▲ 헤론 선교사(왼쪽)과 그의 아내였던 해티

헤론 선교사는 미국 테네시(Tennessee) 주 메리빌대(Maryville Univ.)와 뉴욕의대를 수석 졸업하여 의대 교수 초빙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미 북장로회 선교사로 1885년에 한국에 온다. 그가 조선에 선교사로 오기로 결심한 것은 조선(한국)기독교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이수정이 쓴 편지가 실린 선교 잡지를 읽고 크게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란다.

“미국 사람들이여, 조선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오! 조선 백성들은 문명을 모르고 어둠 속 깊은 잠에 빠져 있습니다.”

헤론 선교사는 병들어 죽어가는 가난한 나라에 가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해야 한다며 미 북장로교를 찾아 선교사 파송을 부탁한다.

26세의 젊은 나이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먼저 일본으로 가서 이수정에게 조선말을 배우고 풍속을 익힌 다음 1885년에 6월 21일 다른 몇 선교사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했다.

당시 이미 먼저 조선에 온 의료 선교사 알렌(Horace Allen)은 갑신정변으로 치명상을 입은 민영익을 수술하여 살려냄으로 고종의 신임을 얻어 궁정 시의로 임명 받게되어 궁정 사람들만 치료하는 서양 병원 광헤원 설립을 허락받았으나 알렌 선교사는 일반 백성들도 치료할 수 있도록 탄원하여 제중원이라는 이름으로 바꾼다(1885년 4월 26일). 비로소 일반 백성도 서양 의학의 혜택을 보게 되고 이로써 의료 선교의 길이 열리게 된다.

바로 이 시기에 헤론 선교사는 제중원 제2대 원장으로 취임하게 된다.

헤론 선교사는 동료들에게 따뜻하고 우정이 넘치는 형 같은 사람이었지만, 보수적인 엄격한 도덕주의자였다. 술과 담배를 일체 하지 않았고 파티를 싫어했다. 커피보다 진한 것은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1888년 가을에 새로 온 파워(Power) 의사가 술을 마시고 저녁에 여자들과 노는 것을 혐오했으며, 그의 사임을 당연시했다.

헤론 선교사는 말이 적었다. 또한 알렌 선교사나 언더우드 선교사와 달리 뉴욕 선교부에 편지를 별로 보내지 않았고, 자신의 입장을 굳이 변호하거나 옹호하지 않았다. 다만 테네시에 있는 부모에게는 많은 편지를 보낸 효자였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호불호가 분명하여 친한 사이라도 잘못한 점은 직선적으로 지적하는 스타일이었다.

헤론 선교사는 의사로서는 최고 수준의 명의였다. 1887년 제중원 원장 겸 고종의 주치의가 됐고 외국인들을 진료하면서 왕실이나 공사관들 모두가 만족했다. 다만 외국인들에 대한 진료가 증가하면서 제중원에서 한국인 환자들을 돌보는 시간이 줄었고 따라서 한국어 습득이 지체되는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헤론 선교사는 전도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고 전도를 위해 한국어도 어느 정도 익혔기 때문에, 제중원에서는 치료만 했지만 정동 사택에서는 점차 방문자들에게 전도하고 성경을 가르쳤다. 특히 죽기 직전 병상에서 그는 한국인 하인들을 불러 복음의 기본 진리를 전하고 예수를 구주로 받아들일 것을 유언으로 남기기도 했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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