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colm C. Fenwick (말콤 펜윅) 선교사 ①

Malcolm C. Fenwick, 1863 – 1935 (Entering Korea in 1889)




말콤 펜윅 선교사는 1889년, 약관 26세의 나이로 조선(한국)에 와서 조선(한국) 침례교회를 세운 초대 선교사이다. 그가 전성기에 개척한 교회는 250개였고, 두만강과 시베리아까지 가서 교회를 세우는 열정을 보였다. 그 외에도 성경의 독자적 번역, 찬송가 간행 등 문서선교에 기여한 공이 큰 선교사이다.

펜윅 선교사는 1863년 캐나다 토론토 시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열 한 자녀를 낳은 후 펜윅 선교사가 다섯살 때 죽었다. 그는 신앙이 독실한 어머니와 여러 해 동안 그의 집에 같이 살았던 한 목사님의 영향으로 어린시절부터 교회에 다녔다. “말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대개가 안식일을 기억하지 못하면서 타락하기 시작한다.” 목사님의 가르침으로 인해 그는 죄에 빠지지 않고 주일학교에서 여러가지 직분으로 봉사 하였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가 큰 사고를 당하게 되었는데 이때 펜윅 선교사에게 말했다. “아들아, 네가 예수님께 마음을 드린다면 너를 아무리 멀리 보내도 상관하지 않는다” 이 일로 그는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찾고자 결심했다. 그 뒤 그는 2년 동안 산에 올라가 밤새워 예수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기도했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롭게 살고자 갖은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온갖 노력에도 의로와지기는 커녕 시커먼 죄인임을 발견하고 좌절에 빠졌다. “주님, 저는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입니다.” 그는 절망 중에 토론토 시내 어느 거리를 방황하다가 주님의 인자한 음성을 들었다. “너는 자격이 없지만 내게는 있노라. 나는 너를 살리려고 죽었노라” 이 사건으로 죄사함을 받고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

26세 되던 1889년 어느 날 조선(한국)으로 가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당시 의료 선교사로 조선(한국)에 왔던 헤론 선교사의 아내가 복음을 전했다는 이유로 조선(한국)에서 감옥에 수감되었고, 조만간 교수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캐나다 신문은 연일 그 소식을 다뤘다. 그 때 그 일을 들은 고향 집의 연로한 목사님이 슬픔 중에 회중 앞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말했다. “주여, 주께서는 조선(한국)이 태평양 한 가운데 있는 섬인 줄을 잘 아시나이다” 이 정도로 당시 지식인들도 한국이라는 나라가 지도 어디에 붙어 있는지 조차 몰랐다. 그도 한국이 지중해에 있는 어떤 섬인 줄로 알았다. 그는 선교사가 가는 곳은 으례 무더운 지역인 줄로 알았다.

그러므로 한국에 연중 석달 동안 눈이 120센티나 쌓일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도대체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명확한 상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는 보다 앞서 조선(한국)에 간 맥켄지 선교사와 아는 사이였다. 그는 맥켄지 선교사에게 신학 공부를 하지 않은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편지를 썼다. 또 외국어를 공부해 본 적이 없고 한 언어라도 제대로 말할지 자신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멕켄지 선교사는 말했다. “가서 예수를 위해 죽을 마음이 없습니까? 그들이 배척하더라도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면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 앞에 떳떳할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선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이후 나이아가라 사경회에서 다년간 성경공부를 했다. 그 당시 그는 철물 도매업을 했으며 직원 40명을 거느린 창고 책임자였다. 그는 저녁 시간을 이용해 성경을 공부하고 기회가 닿으면 복음을 전했다. 그러다가 나이아가라 사경회를 하는 중에 다시 한번 이방인들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부르심을 받았다. 그러나 또 변명했다. “저는 사업가에 불과한 사람입니다.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습니다. 목사도 아니고 신학교에 가본 적도 없습니다.” 주님은 다시 “가라”고 명했다. 그날 저녁 인도에서 온 윌더라는 형제로부터 사막에서 애타게 물을 찾으며 죽어가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사막에서 물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에게 화려한 유리 주전자에 물을 담아 화려한 유리잔에 따라 주면 감사하게 마실 것이다. 그러나 더럽고 쭈그러진 양철통에 물을 담아 주더라도 역시 감사하게 받아 먹고 생명을 보존할 것이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물이다” 이 말을 듣고 변명하는 마음을 버렸다. 적어도 찌그러지고 누추한 양철통은 되어 생명수를 전달할 수는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즉시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넉달의 항해 끝에 조선에 도착했다.

처음 열 달은 한국어를 배우려고 각종 교과서들과 지침서를 탐독했다. 그러나 암기하는 방식으로 실패한 후 조선(한국)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기로 결심했다. 그는 몇몇 조선(한국) 친구들과 함께 황해도 소래로 떠났다. 당시 조선(한국)에는 사냥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사냥꾼들의 낙원이었다. 다섯 종류의 오리떼들이 4-5km의 강을 빽빽이 뒤덮었고, 들거위들이 물댄 논에서 날아오를 때는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하늘이 까맣게 덮일 정도였다. 산에 들어가면 멧돼지, 흑곰, 표범과 호랑이 같은 큰 사냥감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그는 소래 마을에서 소년반을 하나 만들고 마을 여성 중 유일하게 글을 깨우친 안 선생 부인이 부인들과 소녀들을 가르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성경을 가르칠 때 한국어로 찬송을 부르고 싶고 가르치고 싶었다. 짧은 어휘로 고생을 했는데 특히 문제된 문장은 “너희에게 생명을 바치신다” 였다. 한국어에는 하인이 상전에게, 백성이 임금에게 어떤 것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바치는 것에 해당되는 단어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번역을 본 조선(한국) 친구들이 가당치 않은 일이라고 반발했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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