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lcolm C. Fenwick (말콤 펜윅) 선교사 ②

Malcolm C. Fenwick, 1863-1935 (Entering Korea in 1899)


성경 공부를 위해 시골에서 올라온 8명의 남자들과 말콤 펜윅 선교사

“위대하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비천한 하인의 자리로 끌어내리고 우리 같은 진토의 벌레들을 높은 자리로 끌어 올리다니 이건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하인이나 백성이 자기 임금에게 무엇을 바칠 때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바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하인의 자리를 취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은 비록 그리스도인이라 고백은 했지만 관습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펜윅 선교사는 일어나서 말했다. “선비 여러분, 빌립보서 2장 5절을 보십시오.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께서 친히 종의 형상을 입으셨다고 말합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하인들이 여러분에게 하듯 그분을 두 손을 뻗어 여러분에게 영원한 생명을 값없는 선물로 '바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그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 선물을 걷어 찰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말했듯이 진토의 벌레들과 같은 우리들 앞에서 영광의 주님이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분의 이름으로, 그리고 다음과 같은 찬송으로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생명을 여러분에게 바치시네, 아멘.”

이 말을 들은 한 젊은이는 입을 다물고 조용히 걸어 나갔다. 문을 열고 돌아선 그의 얼굴에는 두 줄기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펜윅 선교사는 1893년 잠시 귀국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신학교육과 훈련을 받고 침례교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듬해 다시 내한해 보니 신자가 300명가량으로 늘어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소래에서 원산으로 선교지를 옮기고자 했다. 그가 캐나다에 간 사이 소래에 프로테스탄트 선교부가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소래 사람들은 남아서 자기들의 목사가 되어 달라고 간청했다. 급료를 지불하고 더 큰 집을 지어 주고 하인들을 붙여주고 전도를 돕겠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소래에 미련을 버리고 교회가 없는 새로운 선교지를 찾아 원산으로 갔다.

펜윅 선교사는 자서전에서 조선(한국)인들을 이렇게 평가했다. “조선(한국)인들의 생김새는 중국 사람들과 다르고, 일본 사람들과는 딴판이다. 일본 사람들보다 키가 훤칠하고 몸집도 크고, 지적으로 더 우수하며, 일본 사람들에게 가득한 잔인한 말레이족의 피가 조금도 흐르지 않는다. 조선(한국) 사람들은 명민하여 어떤 가르침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과 창의력이 있고, 근면하고, 고생과 시련을 초인적으로 잘 참아 내며, 적자가 생존하는 야생 동물들과 비슷한 활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백인에게 아주 예의 바른 태도를 보이고 심지어 웃음을 띠고목례를 할지라도 속으로는 메스꺼워하고 경멸하고 싫어한다. 속으로는 '백인은 무례하고 거만하다. 비누냄새를 풍긴다고 생각한다.” 펜윅 선교사는 이렇게 백인을 야만인으로 경멸하는 그들에게 몇 달이고 주일마다 찾아다니면서 설득했고, 눈물로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다. 또한 예수님이 그 보혈로 자신의 죄를 씻으심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무거운 죄짐을 벗고 마음에 얻은 평안을 증거했다.

그는 출입이 허용된 지역들을 철저히 전도했다. 먼저 성경반을 열고, 성경과 쪽복음을 비치하고 경험 있는 사람에게 공부반을 맡기며 그를 그 지역 지도자로 삼았다. 그 지도자에게 10-20명의 전도자들이 배속되었다. 전도자는 한 달 동안 팔 수 있는 분량을 짊어지고 자기가 맡은 군으로 가 읍과 촌락들을 방문했다. 빠지는 집이 없도록 주의를 기울이고, 되도록 모든 사람을 만나며, 만나는 사람에게 간절히 때로는 눈물로 호소하며 복음을 전했다. 한 권에 0.5센트나 1센트하는 복음서를 그들이 사지 않으려고 할 때는 요한복음 3장이 적힌 전단이나 성경본문을 적절한 주제에 따라 배열해 놓은 전단을 건네 준다. 관할 구역을 다 돌아보기 위해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이 일을 되풀이한다. 이렇게 해서 펜윅 선교사는 31교회를 세웠다. 교회를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십인 순장(총장)들을 두었다. 이들이 맡은 일은 집사들을 보조하는 것이다. 집사들은 그들을 감독하고 교회 재정을 관리하며 신앙감독도 하였다. 집사들 위에는 조사들이 있었는데 조사들은 목사들의 감독하에 담당교회들을 돌보았다. 목사들 위에는 감목, 또는 치리 목사가 있었고 목사들은 석 달에 한 번 담당 지역들에서 성경공부 및 행정적인 일을 위해 모임을 가졌다.

펜윅 선교사는 조선(한국)에서 25년간 선교사의 삶을 살았다. 때로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외로움에 시달렸다. 1899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어머니께로 갔다. 그러나 병이 회복된 후 또 작별하게 되었다. 이때 어머니는 담대히 말했다. “아들아, 괜찮다. 예수님이 곧 다시 오실 게고, 그 날이 오면 서로 다시 만나 영원히 더 이상 자결하지 않게 될 거다.” 정거장에서 어머니를 뒤로 한 채 조선(한국)으로 오는 그의 눈에는 눈물이 북받쳐 올랐다.

그는 조선(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후 한 아편 중독자를 회심시켰다. 그러자 동네사람들은 귀신들이 그를 쫓아다니며 식구들을 죽일 것이라고 위협했다. 얼마 후 그들의 말 대로 할머니가 죽었다. 마을 사람들은 큰 굿을 벌여 귀신들을 달래라고 재촉했지만 그는 거절하고 기독교식으로 장례를 치뤘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그의 어린 자녀들 중 둘이 악성 열병에 걸려 갑자기 죽게 되었다. 동네사람들은 다시 귀신 달래는 장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는 말했다. “나는 예수식으로 장례를 치를 거요. 아이들이 죽기 전에 예수에 관해 들은 것을 참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는 열 달 만에 교인 수 평균 45명이 되는 열 개의 교회를 세웠다. 이런 역사에 힘입어 펜윅 선교사가 세운 교단은 1년 6개월 동안 교회수가 162개로 늘어나게 되었다. 이처럼 조선인들과 수많은 선교사들의 고결한 희생으로 말미암아 조선(한국) 땅에 복음이 심기워지게 된 것이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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