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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 35

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 ①

박흥배 목사 | 등록일 2020년02월03일 12시17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William Martyn Baird, June 16, 1862 - November 29, 1931 (Entering Korea in 1891)

 
개인적으로 배위량 선교사님은 우리 가정에서는 잊을 수 없는 분이시기도 하다. 필자의 증조부께서 거의 125여년 전, 당시 경북 안동읍 5일장에서 배위량 선교사님으로부터 복음을 받으신 이후 지금까지 믿음의 유산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마포삼열 선교사, 배위량 선교사, 나중에 소개할 편하설 선교사, 이 세분을 편의상 하노버 트리오(Hanover Trio)라 필자가 부른다. 그 이유는 이 세 분은 태어난 고향도, 대학도, 신학교도, 선교지까지 같기 때문이다. 인디애나(Indiana) 주 매디슨(Madison) 시에 소재하는 하노버대학(Hanover College) 출신이기에 하노버 트리오라 필자가 지었다.
 
“베어드(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가 조선(한국)으로 배정 받았다니 기쁩니다.” 베어드보다 1년 앞서 파송 되었던 마펫(Samuel A. Moffett, 마포삼열) 선교사의 마음이 물씬 묻어나는 편지 글이다. 대학(하노버)과 신학교(맥코믹)를 8년동안이나 동문수학했던 가장 친한 친구가 같은 조선(한국) 선교사로 결정되었으니 얼마나 기뻤을까? 당시 북장로
가운데 앉은이가 배위량 선교사
 
교 선교회는 서울 이외의 ‘외지 선교지부’(out station) 개척 문제를 놓고 많은 토론을 한 결과, 북부지방에는 평양을, 남부지방에는 부산이 그 대상지로 선정되었다. 이것은 부산뿐만이 아니라 영남지방 전체를 향한 선교의 거룩한 결정이 되었던 것이다. 선교사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아마 마펫 선교사는 친구인 베어드 선교사가 오기를 소망했던 모양이다. 그러나 베어드 선교사는 이미 중국 닝포의 선교사로 임명된 상태였기 때문에 그 뜻을 바꾼다는게 쉽지 않았다.
 
그가 고뇌하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있을 때 한통의 편지가 선교 본부로부터 당도하였다. “우리는 조선(한국)의 남부지방에 또 다른 하나의 선교지부를 마련하려고 합니다. 위험이 따른다고 할 지라도 당신이 바로 그 지역을 개척할 분이 아니신지요?” 선교총무 엘린우드(Eleenwood) 박사가 보내온 간곡한 요청이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당신이 준비된 그 사람이 아닌가?’라는 엘린우드 박사의 말을 곧 하나님의 응답으로 믿고 그 제안을 수용하였다. 조선(한국)의 남부지방이 아직 선교의 불모지로 버려져 있을때 하나님께서는 이미 당신의 종 베어드 선교사를 준비하고 계셨던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는 하나님의 뜻에 즉각 순종하여 아내와 함께 1891년 1월 29일에 부산에 도착하였다. 그는 선교사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부산지부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야말로 영남 지방 최초의 북장로교 선교사가 되었던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1년 9월부터 부산에서 본격적으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베어드 선교사의 관심은 결코 부산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연중 7개월은 집을 떠나 있을 정도로 순회전도 사역에 열중하였다.
 
특히 대구와 경북지방 기독교 역사에 기념비적인 여행은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까지 대구를 위시한 경북지방 여러곳을 전도한 것이었다. 이 전도 여행은 유구한 역사 속에서 기독교 복음의 사자가 처음 대구 경북지역을 방문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방문한 날들이 그 지역에 기독교 복음이 처음으로 전래된 감격적인 순간이었던 것이다. 여러지방을 순회하면서도 베어드 선교사가 늘 눈여겨 보았던 곳이 바로 대구였다. 그것은 대구야 말로 영남지방의 선교를 위한 최고의 전략지임을 갈파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의 관심은 1896년 1월 대구 남문 안에 있던 정완식의 집을 구입함으로써 역사적인 대구 선교지부의 초석을 놓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 그는 대구 경북지방의 선교 초석을 놓기 위한 하나님의 택하신 그릇이었다. 그의 마음은 영남의 깊숙한 내륙 도시들 마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영남 내륙의 도시들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던 베어드 선교사는 드디어 1893년 4월 17일부터 5월 20일에 걸친 한 달 간의 내륙 전도를 감행하였다. 부산 동래에서 출발하여 경상도 북부지방을 전도하기 위한 한달 장정의 대전도여행이었다. 그는 조랑말을 타고 서경조 전도사와 심부름 꾼인 시골소년 박재용과 더불어 두 사람의 마부를 짐꾼으로 고용하고 400마일(약 1,240리)의 장거리 전도 여행에 나섰던 것이다.
 
4월 20일에 밀양에 도착하여 전도 책자를 팔면서 전도하는데 처음에는 사람들이 피하다가 밀양을 떠나려고 할 때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기 위해 몰려 들었다. 21일 청도 삼거리를 지나 대구로 들어오기 위해서 팔조령을 넘어 가창을 경유하여 22일 오후 1시 경에 대구에 도착하였다. 많은 사람들이 전도책자에 관심을 보였는데 저녁까지 책을 사기위해서 몰려 왔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대구의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졌는데 그 일환으로 당시 대구의 대표적인 약령시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구에 3천 7백호가 살며 약 5만의 주민이 거주한다는 등의 자료를 충분히 조사하려고 노력하였다. 이런 자료들은 나중에 그가 대구 선교지부를 청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사용되었음은 자명한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 일행은 25일 아침에 동명을 지나 26일 저녁에 낙동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는 경북지방 최초의 신자인 김재수(金在洙)를 만났는데, 그것은 그의 집이 낙동면 화산리로 상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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