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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 36

William M. Baird (배위량) 선교사 ②

크리스찬타임스 | 등록일 2020년02월10일 11시5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William Martyn Baird, June 16, 1862 - November 29, 1931 (Entering Korea in 1891)

 

대구 초창기 목회자들(좌로부터 박영조, 이만집, 김기원, 정재순 목사)

 

일찍이 김재수는 병이 들어 부산 선교부까지 찾아가서 병을 치료하면서 예수를 믿은 사람이었다. 그는 나중에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하여 경북지방의 최초의 조사, 최초의 장로, 최초의 목사가 되는 영광을 누렸다.
 
28일 오전에 상주에 도착하여 며칠을 머물다가 5월 1일에 용궁, 4일에 풍산 역, 5일에 안동, 8일에 영천, 13일에 경주, 18일에는 울산을 경유하여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원 모양으로 내륙을 순회하는 대장정이었다.
한 달간에 걸친 이 전도여행은 하루 평균 60에서 65리 정도를 걸은 것이며, 일행들이 여러차례 병이 났고, 마부들이 교체되는 등 여러가지 교통의 장애에도 불구하고 가능했던 것은 오직 영남 내륙지방을 전도하고자하는 베어드 선교사의 뜨거운 열망 때문이었다.
전도자 베어드 선교사가 답사하며 복음의 씨를 뿌린 것이 각 지방들마다 최초로 복음이 전래된 것이며, 그가 뿌려놓은 길목을 따라 아름다운 코스모스가 피어나듯이 주님의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들이 수없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대구에 사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한두 번 쯤은 듣고 가슴아파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예전에 남한의 예루살렘이었던 대구가 지금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하는 쓰라린 자기반성의 목소리이다.
과연 대구가 조선(한국)의 예루살렘이었는가? 그렇다면 어떻게해서 그런 명칭을 가지게 되었을까? 여러 요로를 통해 확인해 봐도 그에 대한 시원한 대답은 없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말은 과거부터 내려오는 ‘북평양 남대구’라는 말과 관련이 있고, 또 그 말이 그렇게 발전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조선(한국)에 사역했던 4대 장로교 선교부 중에 명실상부한 최대의 선교부는 미국 북장로회였다. 북장로회는 서울을 중심으로 남북한에 8개의 선교지부를 두고 있었는데,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서북지방과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지방이 그중에 최대의 선교구역이었다. 그야말로 선교사역에서 대구가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북한의 평양만큼이나 컸던 것이다.
말 그대로 ‘북평양, 남대구’였고, 선교부의 시각으로 볼 때 한국의 예루살렘이 평양이었다면, 당연히 남한의 예루살렘은 대구인 것은 자명하지 않은가? 그럼 대구에 언제 어떻게 장로교회 선교부가 시작되었는가?
 
최초의 선교사인 베어드 선교사의 내륙순회 사역의 결과로 미국 선교본부에 청원했던 대구 선교지부 설립건은 1895년 11월에 승인이 났다. 물론 첫 승인은 부산 선교지부의 내륙지회(inland mission)로의 허락이었지만, 1913년 이후 부산 경남지방이 호주 장로회로 이관된 후부터 대구는 북장로회의 남한의 최대의 선교지가 되었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5년 12월에 대구에 올라와 선교부 기지를 물색하였다. 이때는 동학혁명이 일어난 직후였고, 또한 청일전쟁의 긴장이 고조된 시기였기 때문에 일부 도시 사람들은 집을 팔고 산속으로 피신을 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으로 부동산을 쉽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것이다.

 
베어드 선교사는 1896년 1월, 대구 남문 안에 위치한 정완식씨 소유의 집을 구입하였는데, 이곳이 현재 약전골목에 위치한 구 대구제일교회당 부지로서 역사적인 대구 선교지부 자리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영남 내륙지방 복음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베어드는 대구에 부임한지 6주 만에 서울로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공식적인 이유가 북장로회 선교부의 교육담당 고문으로 서울로의 발령이지만, 그가 대구 선교를 포기하고 서울로 떠난 이면에는 대구 사람들의 극성스런 모습 때문이었다고 하는 설도 있다. 생각해 보면 베어드 부인과 그들의 아기는 대구에 처음 나타난 백인 부인이요, 백인 아기였던 것이다.

 
때문에 호기심 많은 대구 사람들이 이들을 구경하기 위해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몰려오는 통에 대문이 부서지기도 하고 물독이 넘어뜨려지기도 했다. 심지어 밤중에 신방을 구경하듯이 외국인들이 어떻게 잠을 자나 보려고 문에 구멍을 뚫을 정도였다.
이로써 베어드 선교사의 부인은 신경과민이 될 정도로 무서움을 느끼게 되었고, 밖에 나다니는 것조차 힘들어 했던 것이다. 아마도 이런 속사정이 베어드 선교사 가족으로 하여금 대구 선교를 단념하게 만든 실질적인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 후에 베어드 선교사가 평양에서 숭실대학을 설립하고, 또한 북장로회의 교육정책을 실질적으로 수립하는 등 탁월한 그의 선교활동을 볼 때, 그가 대구에서 사역했더라면 더욱 더 발전적이었지 않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대구를 위해서 더욱 적절한 사람을 이미 예비하셨는데, 그가 바로 최초의 거주 선교사인 아담스(James E. Adams, 안의와) 선교사였다.

 
아담스 선교사는 베어드 선교사의 처남으로 이미 1895년 5월 29일에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익히면서 선교에 대기 중이었다. 이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새로운 종을 통해서 대구 경북지방의 선교역사는 놀라운 장을 펼치게 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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