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nie L. Baird, 1864-1916 (Entering Korea in 1891)

배위량 선교사 부부 Annie L. Baird(왼쪽) Rev. William M. Baird(오른쪽)

나는 선교사 배위량의 부인입니다
나는 배위량 선교사의 부인입니다. 한국 찬송가 387장(통440)의 '멀리 멀리 갔더니'와 375장(통421)의 '나는 갈길 모르니'를 내가 작사했습니다. 1895년 부산에서 가사를 지었기 때문에 찬송가에는 '배위량 부인 1895'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남편 배위량(Rev. william M. Baird)은 미국 북장로회에서 한국으로 파송한 선교사입니다. 나의 처녀 때 이름은 애니 로리 아담스(Annie Laurie Adams)이었으나 배위량씨와 결혼하여 베어드 부인(Mrs. Annie Laurie Baird)이 되었습니다. 당시 조선(한국) 사람들은 나를 안애리(安愛理)라고 불러주었지만 그때의 조선(한국) 부인들은 남편의 이름 뒤에 댁이라는 호칭으로 불렸기 때문에 나도 '배위량 부인'이 '안애리'보다 더 친숙합니다.
나는 1864년 9월 15일 미국 인디애나주(Indianna)에서 부유한 집의 3남 5녀 중 막내딸로 태어났습니다. 하노버 대학(Hanover College)에 다니면서 배위량씨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녀 때에 캔자스주(Kansas) 기독여자청년회(YWCA) 간사로 활동하다가 배위량씨와 결혼하였습니다. 배위량씨와 나는 '무디-생키 부흥'(the Moody- Sankey Revivals)에서 은혜를 받았으며 성령충만하여 있었고 해외선교에 마음이 불타 있었습니다.
배위량씨는 시카고(Chicago)의 매코믹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가 되었고 조선(한국) 선교사로 오기로 되어있었습니다. 배위량씨와 나는 1890년 11월 18일 결혼식을 올렸고 결혼 당일에 조선(한국)으로 오기 위하여 고향을 떠났습니다. 선교지로 가는 길이 신혼여행 길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항을 떠나 태평양을 건너 1891년 1월 29일 부산항에 도착하였습니다.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는 서울에 언더우드, 평양에 마펫, 그리고 부산에 배위량 선교사가 지역적 배치를 받았습니다. 당시의 부산은 너무나 초라하였습니다. 부산항은 모래가 있는 해수욕장에 돛단배가 여러 척 있는 모습이었고 지붕이 눈높이에 있는 초가집들 사이에 기와집이 간혹 한 채씩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벌거벗은 채로 놀았고 사람들은 더러운 옷을 입고 다녔습니다. 부인들의 얼굴은 햇볕에 검게 타 있었습니다.
부산에는 주택난이 심하여 배위량 선교사 혼자 내려가 있다가 1891년 11월에 서울에 있던 내가 부산으로 내려왔습니다. 배위량 선교사와 나는 조선(한국)인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왔고 조선(한국)인 거주지에 땅을 사고 싶었지만 조선(한국) 사람들은 땅을 외국인에게 팔지 않았습니다. 조선(한국)인이 거주하는 동래에 구입하려 하였지만 땅을 팔지 않는다고 하여 난감했습니다.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배위량 선교사는 부산 선교기지의 부지를 동래에서 구하지 못하여 할 수 없이 일본인 무역항 구역 내에 있는 땅을 사들였습니다. 알렌 박사의 도움을 얻어 조선(한국) 정부로부터 땅을 사고 실제로 농사짓고 있는 조선(한국)인에게 땅값을 다시 지불하고야 겨우 일본인 무역항 구역 내에 있는 땅을 사들였습니다.
배위량 선교사는 중국인 건축업자와 계약을 맺고 중국인 인부들을 데려다 건축 일을 시켰습니다. 그 중국인 건축업자는 하청업자에게 건축 일을 넘겨주고 공사대금 전액을 가지고 서울로 가버리면서부터 건축은 어려워졌습니다. 하청업자는 처음 계약 조건을 완전히 무시하고 공사대금을 청구하였고 일하는 인부들은 무법자처럼 행동하였습니다. 배위량 선교사는 일본과 인천에서 건축 재료를 구입하여 중국배에 부쳤는데 어떤 재료는 배위에서 썩고 좋은 재료는 나쁜 재료들과 바꿔치기했으며 중국 인부들은 유리와 값비싼 재료들을 빼돌려서 배위량 선교사는 마음고생이 심하였습니다.
중국 인부들은 자신들이 요구하는 대로 돈을 내라며 집을 점거하고 시위를 하였습니다. 아편을 하는 중국인부가 배위량 선교사에게 협박을 하여 결국 중국 인부들이 청구한 만큼의 돈을 다 지불하였고 값비싼 대가를 치루었습니다.
나는 그때 첫아이를 임신중이었습니다. 배위량 선교사는 장기간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내가 첫아기로 여자 아기 낸시 로즈(Nancy Rose)를 낳고 산후조리가 끝나면서 1892년 11월 새로 지은 집에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이 시작되었습니다. 큰길 옆에 있는 사랑채는 영선현교회가 되었습니다. 딸 낸시 로즈는 유아세례를 받았으나 두 돌을 앞두고 뇌척수막염으로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첫딸을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선교사들의 묘지에 묻었습니다. 나에게 한없는 슬픔이 찾아왔습니다. 하노버 대학시절 아주 활발하고 지성적이고 신앙이 강하다는 평을 받은 나였지만 남편 배위량 선교사가 일년의 반 이상을 순회전도에 가고 나면 밀려오는 외로움과 슬픔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죽은 딸아이의 묘지에 갔다가 태평양을 향한 바닷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정처 없이 다녔습니다.

처녀 때 고향에서 불렀던 찬송가가 생각났습니다. 무디-생키 부흥집회때 많이 불렀던 피셔의 곡에다 가사를 지어 불렀습니다.
1.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2. 예수 예수 내주여 마음아파 울 때에 눈물 씻어 주시고 나를 위로 하소서 3. 다니다가 쉴 때에 쓸쓸한 곳 만나도 홀로 있게 마시고 주여 보호 하소서 (후렴) 예수 예수 내주여 지금 내게 오셔서 떠나가지 마시고 길이 함께 하소서 아멘.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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