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raham Lee. Jun. 2, 1861 - Dec. 2, 1916 (Entering Korea in 1892)


Graham Lee 선교사 가족사진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발흥에 가장 크게 기여한 그레함 리(Graham Lee) 선교사 역시 맥코믹 신학교 출신이다. 이길함 선교사 만큼 부흥운동을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시키는데 기여한 사람은 드물 것이다. 1861년 6월 2일 일리노이(Illinois) 주, 록 아일랜드(Rock Island)에서 출생한 이길함 선교사는 레이크 포레스트(Lake Forest) 대학과 1889년 뉴저지 대학(프린스톤 대학 전신)을 수학한 후 커네티커트 하트포드(Hartford)의 플럼 하트포트 신학교(Plumb Hartford Seminary)로 진학했다. 1년을 그곳에서 수학한 이길함 선교사는 시카고의 맥코믹으로 적을 옮겨 1892년 마지막 2년을 맥코믹에서 공부하고 1892년에 졸업했다. 졸업하던 바로 그해 일리노이 록 리버(Rock River) 노회에서 안수를 받고 곧 바로 평양으로 향했다. 그가 1912년 건강 악화로 선교사를 사임할 때까지 평양에서 그가 이룩한 선교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평양신학교 교수, 장대현교회 담임목사,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지도자로 그의 활약은 대단히 화려했다.
남감리교 하디 선교사를 주 강사로 1906년 8월 26일부터 9월 2일까지 열린 평양 주재 선교사들을 위한 사경회에서 놀라운 도전과 성령의 역사를 체험한 이길함 선교사는 자신이 맡고 있는 장대현교회로 돌아와 자신이 은혜받은 요한 1서를 본문을 가지고 1주일간 제직 사경회를 열었다. 얼마 후 존스톤(Johnston) 선교사를 초청해 장대현교회에서 특별 사경회가 열렸을 때 장대현교회 조사 길선주가 큰 은혜를 체험했다. 이와 같은 준비 속에서 이길함 선교사는 1907년 1월 2일부터 자신이 맡고 있는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열린 사경회 때 수 많은 사람들과 놀라운 성령의 역사를 공유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오순절의 은혜를 경험한 이길함 선교사는 이 평양의 축복을 전국교회와 공유하기 위해 동료 선교사들과 길선주 장로를 비롯 조선(한국)인 지도자들과 함께 전국을 누비며 다녔다. 1907년 1월부터 6월까지 평양부흥운동이 전국적인 현상으로 발흥할 수 있기까지 이길함 선교사의 공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부흥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미국 선교본부가 피력해 선교본부가 조선(한국) 부흥운동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취 할 때도 일련의 강력한 항의 편지를 보내며 평양대부흥운동을 강력히 변호했던 것도 이길함 선교사였다. 마포삼열이 평양 선교의 개척자라면 이길함 선교사는 평양대부흥운동을 통해 평양을 동방의 예루살렘을 끌어올린 실질적인 선구자였다.
평양에 막 동이 터 오르던 1892년에 조선(한국)에 입국해 총회가 조직되던 1912년까지 20년간 이길함 선교사가 이룩한 업적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이 기간으로만 평가한다면 이길함 선교사 보다 더 큰 선교 사역의 결실을 거둔 선교사는 없을 것이다.
1907년 1월 14일 장대현교회에 놀랍게 임한 오순절의 역사 그 이후 100만인 구령운동이 막을 내리던 1912년까지 평양은 물론 전국적으로 낮을 기다리고 있는 횐 추수밭을 목도하면서 추수하는 일에 혼신의 힘을 다한 나머지 그만 자신의 건강을 잃고 말았다. “아마도 그가 건강의 문제로 1912년 사임하지 않았다면 그의 명성과 위치는 마포삼열을 능가했을 것이다.”(총신대 박용규 교수)
1912년 건강 문제로 더 이상 선교 사역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한 이길함 선교사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캘리포니아 Saratoga에서 휴양을 취하고는 다시 목회 전선에 뛰어 들었다. 1913년부터 1915년까지 캘리포니아 주(California) 콩코드(Concord)에서 그 남은 정열을 쏟아 붓고는 1916년 12월 2일 캘리포니아 주(California) 길로이(Gilroy)에서 향년 55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1903년 원산부흥운동,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 그리고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에 이르기까지 한국교회 대부흥운동의 전 역사를 현장에서 목도했던 부흥운동의 주인공, 이길함 선교사는 이렇게 해서 길지 않은 그의 생애를 마감해야 했다. 그는 한국교회의 부흥을 위해 하나님이 특별히 예비하신 선교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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