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iver R. Avison. Jun. 3. 1860 - Aug. 29. 1956 (Entering Korea in 1892)

(사진 왼쪽) 에비슨 선교사 (오른쪽) 집도하는 에비슨 선교사(오른쪽), 허스트 선교사(왼쪽),

최초의 한국인 의사 박서양(가운데)

에비슨 선교사는 1860년 6월 30일에 영국 요크셔에서 태어나 1866년 캐나다로 이주하였다. 1879년 오타와의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고, 1884년에는 토론토의 온타리오 약학교를 졸업 후에 모교에서 교수로 활동하였다. 1884년 토론토 대학교 의과대학에 편입하여 1887년 6월에 졸업하였다. 의과대학 재학 중인 1885년 7월 제니 반스와 결혼하였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강사를 거쳐 교수가 되었으며 토론토 시장의 주치의로도 활약하였다. 1892년 9월 선교 모임에서 만난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선교사로부터 해외선교의 제안을 받자 교수직을 사임하고 1893년 미국장로회 해외선교부의 의료 선교사가 되었다.


1893년 6월 가족과 함께 캐나다 밴쿠버를 떠나 부산을 거쳐 1893년 7월, 온 가족과 함께 조선(한국)에 온 에비슨 선교사는 그해 11월부터 제중원의 책임을 맡아 환자들을 진료하는 한편 황제의 시의로도 활동했다.
당시 제중원의 상황은 매우 어려웠다. 의료진과 시설도 부족했고, 경영 상황도 형편없었다. 민중들의 생활 환경이 매우 열악해서 수많은 전염병이 발생했다. 에비슨 선교사는 비위생적인 환경 때문에 서민들이 잘 걸리는 말라리아, 이질, 발진티푸스 등 환경성 전염병 치료에 최우선의 노력을 기울였다.

에비슨 선교사는 당시의 보통 선교사들과는 달리 진보적이고 열린 신앙과 사고를 지니고 있었으며, 조선(한국)인에게 좋은 친구 같은 선교사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삶들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고 그들을 돕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무어 선교사와 함께 백정 백성춘의 집에 찾아가 직접 치료해 주었고, 1895년에는 백정들에 대한 신분 차별을 없애 달라는 편지를 당시 내부대신 유길준에게 보냈다. 또 그는 당시 일본의 제국주의적 침략 정책과 조선 지배를 반기지 않은 몇 안 되는 선교사 중 하나였다.

에비슨 선교사는 제중원을 국립병원에서 민간병원으로 바꾸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결국 1894년 9월부터 제중원 운영을 북장로교 선교부에서 맡게 되었고, 에비슨 자신이 전적으로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는 효과적인 진료를 위해서는 소규모 진료소들을 하나로 묶어 규모있는 병원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그는 첫 안식년을 맞은 1900년, 미국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서 조선(한국) 선교의 중요성과 과제에 대해 강연하면서, 병원 건립에 필요한 기금 마련을 호소했다.

이러한 바람은 스탠다드 석유회사 동업자요, 강철회사 사장인 세브란스 장로(Louis H. Sevrance)가 병원건립기금을 기부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에비슨 선교사는 세브란스 장로의 기부금으로 남대문 부근 부지를 매입하여 현대적 병원을 세웠으며, 1904년 9월, 구리개에 있던 제중원을 남대문 옆으로 옮기고 이를 '세브란스 병원'으로 개칭했다. 이후 그는 1925년까지 세브란스 병원 병원장으로 재임하며 병원을 발전시켰다.

에비슨 선교사는 한국인 의사와 간호사의 양성을 위해서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899년에 개설한 제중원 의학교를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1904년)로 개칭하고 1908년 1월, 7명의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첫 졸업생 중에는 그가 무어 선교사와 함께 치료한 백정 박성춘의 아들 박서양도 있었다. 이 학교는 1913년에는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성장하였고, 1934년까지 교장으로 일했다.

1915년 조선기독교학교(Chosun Christian College)가 언더우드에 의해 개교하자 에비슨은 부교장에 임명되었고 1916년 교장인 언더우드가 사망하자 교장으로 취임하였다. 학교는 1917년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언더우드의 형인 존 언더우드(John T. Underwood)의 기부로 1917년 9월에 현재 연세대학교가 위치하는 대지를 교지로서 구입하였다. 1926년에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와 연희전문학교의 합동에 대한 의견이 피력되었고 1926년 6월에 본격적인 논의가 진행되었지만 일제의 간섭으로 진전되지 못했다. 1934년에 에비슨은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에서 물러나 1935년 12월 조선을 떠났으며, 1956년 사망하였다. 한편, 1945년 5월 세브란스 의과대학의 예과를 연희대학교에서 모집하기로 하였고, 1957년 1월에 세브란스 의과대학과 연희대학교는 통합되어 연세대학교가 되었다.

이외에도 1916년 순직한 언더우드 선교사의 뒤를 이어서 경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하여 18년 동안 헌신했다. 이 때 에비슨 선교사는 경신학교 대학부를 연희전문학교로 발전시켰으며, 신촌에 학교 부지를 마련해 이전함으로써 '신촌시대'를 시작했다. 이처럼 그는 의료와 교육, 두 분야에서 탁월한 선교 업적을 남겼다.

에비슨 선교사는 1934년 연희전문학교 교장과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교장에서 퇴임했다. 32세에 조선(한국)에 온지 43년만이었다. 이때 세브란스 병원장은 한국인 의사 오긍선 박사에게, 연희전문학교 교장은 언더우드 선교사의 아들 원한경 선교사에게 물려주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35년 선교사 직에서도 은퇴하고 귀국했다.
평생을 함께 한 아내 제니 에비슨(Jennie Barnes Avison 1862~1936)은 귀국 이듬해인 1936년 9월 별세했고, 에비슨 선교사는 1956년 미국 플로리다 주 피터스버그 St. Petersburg에서 소천했다.
에비슨 선교사 부부는 모두 10남매를 두었는데, 성인이 된 7남매 중 3남매가 한국에서 선교사로 헌신했다. 어릴 때 죽은 딸쌍둥이가 양화진에 묻혔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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