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성경 번역 위원들. 왼쪽위부터 문경호, 김명준, 정동명, W. D. Reynolds(이눌서), H.G. Underwood(원두우), J. S. Gale(기일), G. H. Jones(조원시), 1900년 초반 경, 성경 개정


레이놀즈 선교사

레이놀즈 선교사는 1867년 12월 11일 미국 버지니아 주(Virginia) 노포크(Norfolk)에서 태어났다. 남달리 어학에 재능이 있었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어린시절의 꿈처럼 히브리어, 라틴어, 불어, 독어 등을 익히게 되는데 그의 재능은 훗날 성서번역의 초석이 되었다. 햄던 시드니(Hampden-Sydney University) 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한 후 레이놀즈 선교사는 남장로교신학교에 입학하고, 1891년 안식년을 맞은 언더우드 선교사가 그 해 레이놀즈 선교사가 재학 중인 신학교에서 선교보고 연설을 하게 되는데, 이때 레이놀즈 선교사는 조선(한국) 행을 기도하며 귀한 동역자 전킨 선교사를 만나게 된다. 레이놀즈 선교사와 전킨 선교사는 매일 3시에 기숙사 방문을 걸어 잠그고 온 마음을 쏟아, 선교의 길을 열어줄 것을 끈질기게 간구했다.


1891년 언더우드 선교사를 만난 레이놀즈 선교사가 조선(한국)에 다다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1년이었다. 서민층 전도를 위해 순 한글 성경은 필수였다. 하지만 성서번역을 담당할 유능한 언어학자는 극히 드물었다. 또한 선교의 뜻을 같이하는 볼링 선교사와 조선(한국)에 선교사로 가기로 하고, 결혼하여, 1892년 11월 3일 조선(한국)에 도착하였다. 누구보다도 어학실력이 뛰어났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어학 선생과 함께 강화 섬에 나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며, 한국말로 전도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한국)의 적응 훈련과 언어 훈련을 마친 레이놀즈 선교사 부부는 1894년 3월 27일 군산에 도착하였다. 그들은 말을 타고 임피, 전주, 김제, 영광, 함평, 무안, 우수영, 순천, 좌수영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도하였다. 동학농민군이 봉기하기 직전이어서 민심이 흉흉한데도 각 고을을 돌며 전도지를 돌리고 전도 강연을 하면서 호남 선교의 문을 열어갔다.

새벽 이슬을 맞으며 조선(한국)어와 씨름하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조선(한국)말이 입에 붙게 되자 언더우드 선교사와 게일 선교사와 함께 본격적인 성서번역을 시작하게 된다. 1897년 9월 전주 선교부는 많이 발전하여, 9월 5일 주일에는 교회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 왔다. 집회시 예배 인도자 레이놀즈는 선교사들 중에 우리 나라 말을 가장 잘 했고, 유식한 말로 설교하였다. 이렇게 모인 예배는 전주 서문교회의 설립의 시초가 된다.

레이놀즈 선교사는 1895년 성경번역위원회 남장로회 대표로 선임되면서,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매진한다. 성경번역은 외국인 선교사와 조선(한국)어 선생의 공동작업이라고 할 만큼 조선(한국)어 선생의 역할은 지대할 수 밖에 없었는데, 레이놀즈 선교사가 한글성경번역에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박학다식한 한국어 선생 김필수의 공이 컸다.
끈기있게 성경번역을 진행하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마침내 그 열매를 보게 되었다. 한 권씩 개인역이나 수정역으로 나오던 신약 전체를 묶어서 1900년 단권 신약성경을 출판한 것이다. 출판된 성경에서 여러가지 오류가 발견되자 레이놀즈 선교사와 언더우드 선교사, 게일 선교사는 아예 성경번역에만 매달렸다. 이들은 1902년부터 1906년까지 무려 555회의 토론과 수정 과정을 거친 후에 최초의 공인역본 신약전서를 출판하였다. 히브리어에 정통하였던 레이놀즈 선교사는 1910년 구약성경의 출판에서도 주역의 역할을 하여서, 신·구약 성경 한 권이 온전히 출판되는 일에 쓰임 받았다.

레이놀즈는 선교사는 1917년부터 20년 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어학교수와 <신학지남> 편집인으로도 일하였다. 신학지남은 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에서 간행한 기독교 신학 연구지로,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 교수들의 신학연구논문을 출판하기 위하여 만든 책이며, 장로교회의 신학이해와 신앙영위를 제시해주는 동시에 목사들의 신학 연구를 북돋고 뛰어난 목회자, 설교자가 되도록 도와주기도 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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