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wis Boyd Tate(Sep. 28, 1862-Feb. 19, 1929)

Mattie Samuel Tate(Nov. 24, 1864-Apr. 12, 1940) (Entering Korea in 1892)

테이트 남매 선교사. 여동생 매티 선교사(왼쪽)와 루이스 선교사

호남 선교의 개척 선교사이신 테이트 선교사와 그의 여동생 매티 선교사의 이야기를 통해서 은혜를 나누기 원한다.
테이트 선교사는 대학에서 의과를 전공하고 선교사로 헌신하여 시카고의 맥코믹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1891년 내쉬빌에서 열린 전국 신학교 해외 선교연합회에서 언더우드 선교사와 당시 유학생이었던 윤치호의 조선(한국) 선교에 대한 강연을 듣고 조선(한국) 선교를 결심하고 여동생 매티와 함께 조선(한국) 선교사로 1892년 11월 3일에 조선(한국)에 왔다.

그는 1892년 호남선교의 개척 선발대로 전킨 선교사와 함께 전주에 처음 온 선교사이다. 그는 전주를 중심으로 익산, 정읍, 금구, 태인, 고부, 흥덕, 부안, 임실, 남원 등의 각 지방에서 꾸준히 선교활동을 하였다.
그의 열성적인 선교활동으로 그가 전도하여 설립된 교회가 78곳, 장립한 장로가 21인, 목사가 5인이었으며, 세례를 베푼 교인의 수는 무려 1,500명이나 되었다.
그는 전라노회와 전북노회, 그리고 총회에서도 오랫동안 봉사하였고, 신학교와 성서공회, 예수교서회, 세브란스의학교의 이사로 봉직하면서 조선(한국)선교의 기초를 잘 다져 주었다.

1925년 심장병이 악화되어 조선(한국) 선교 33년간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하여서도, 미국 각처를 순회하며 조선(한국)선교를 위한 강연을 하면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조선(한국) 선교사로 동원하였고, 수많은 미국 교회가 조선(한국) 선교를 도울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동원가의 삶을 살다가 1929년 67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다.
그의 동생 메티 선교사도 오빠 테이트 선교사와 한국에 들어와 한국인 가정심방과 축호전도를 하며 조선(한국) 선교를 위해 최선의 삶을 살았다. 메티 선교사는 특별히 우리말을 유창하게 구사하였고, 우리말 속어까지도 능란하게 구사하면서 부녀자와 어린이 선교에 주력하였다.
그녀는 오빠 테이트 선교사와 말과 가마를 타고 육로로 전주에 와서 여성으로 호남선교의 선두주자 역할을 용감하게 담당하였다. 동학농민혁명군의 난리로 어려움을 겪었지만 굴하지 않고 전주에서 최선을 다해 선교사역을 감당하였다.
주일학교와 성경학교를 세웠으며, 또한 여학교를 시작하였다. 그녀가 시작했던 여학교를 1907년 교육 담당 여선교사 랜킨에게 맡기니 이것이 전주기전여학교였다.

그녀는 조선(한국) 선교 초기에 내한한 여선교사로서 다른 이가 당해보지 않은 많은 고난의 경험 때문에 선교사 가운데서도, 베테랑 선교사의 권위를 지니고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오로지 조선(한국) 여성 선교에 44년간 헌신하였다.
일제의 극심한 교회 탄압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조선(한국)을 누구보다도 사랑하였던 매티 선교사는 은퇴할 나이까지 사역을 잘 감당하였다. 매티 선교사는 처녀의 몸으로 한국 땅을 밟아 한 평생 그의 젊음과 생애를 다 한국을 위해 바치고 77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실로 호남 선교의 개척 선교사였던, 테이트 선교사와 메티 선교사 남매가 조선(한국) 땅에서 이룬 선교의 열매는 컸다. 많은 동료 선교사가 병으로 순교하고, 사고로 순교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그들은 끝까지 나이 많아 은퇴할 때까지 건강하게 사역을 잘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이다. 순교도 아름다운 것이지만, 이렇게 건강하게 끝까지 선교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도 하나님의 축복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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