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사라예보 라틴다리

레베비치 산에 둘러싸인 사라예보를 만납니다. 다민족, 다종교의 국가, 1429년 이후에는 추방당한 유대인이 몰려와 발칸의 예루살렘이라고도 불리운답니다. 내전 전에는 서로 보듬으며 잘 살았던 이웃이 민족과 종교가 다르다고 적이 되어버린 역사가 있습니다. 삶의 과정에서 빼앗고 지키고 하는 생존의 역사 현장을 가서 들여다보며 아파하고 공감하는 것은 새로운 배움의 과정 같습니다.
이슬람과 기독교의 문화가 공존하는 발칸반도 주요 도시 중 하나인 사라예보, 1461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세워진 이래 긴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로 오랫동안 다른 이민족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하였습니다. 내전의 쓰라림에도 현재의 사라예보는 많은 카페와 호텔들이 문을 열어 여행자들을 맞이하고 활기차 있습니다.

전쟁 전에는 모스크와 시장, 아름다운 전경을 지닌 터키식 바자르가 있는 유럽에서 가장 동양적인 도시였습니다. 주황색지붕 사이로 첨탑과 십자가와 둥근 돔 지붕이 섞여 있고, 그 사이를 밀야츠카 강이 흐릅니다.
사라예보는 1973년 세계 탁구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얻어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도시입니다. 1984년에는 사라예보 동계올림픽을 개최할 정도의 여유있는 도시였습니다. 1991년 52만의 인구가 포위 이후 30만명으로 감소되었으며 1992년 내전 당시 1,425일간 포위를 당해 현대사에서 가장 오래 포위당한 도시이기도 합니다.

4년의 내전으로 군수물자는 물론 식량, 물 등 모든 보급로가 끊긴 사라예보, 그때 보스니아군과 시민들은 삽자루와 곡괭이를 들고 땅굴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사라예보부터 공항 뒤편 자유 보스니아 진영이 있는 곳까지 활로를 확보하기 위함 이었습니다. 약 4개월간의 사투 끝에 1993년 7월 30일, 드디어 사라예보의 땅국이 완성됩니다. 한 몸 가누기도 버거운 이 통로가 수백만 사라예보 시민의 생명줄이 됩니다.
구시가지의 밀야츠카(Miljacka) 강의 라틴 다리와 박물관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를 점령했을 때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1914년 6월 28일에 세르비아를 방문합니다. 그때 19세 세르비아 청년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보스니아 사라예보 라틴다리 근처에서 황태자 부부를 암살한 사건이 사라예보 사건(Assassination of Sarajevo)이지요. 라틴다리 건너 박물관 외벽에는 사건 당시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라틴 다리 옆에는 '사라예보 사건'을 기념하는 작은 박물관이 있습니다. 이 박물관은 황태자를 저격한 가브릴로 프린치프가 다리 바로 앞의 모리츠 실러 카페에 숨어 있다가 뛰어나온 곳으로 카페는 당시의 관련자료를 전시하는 '사라예보 박물관 1878-1918'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가브릴로 프란치프가 이 자리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태자 부부를 암살했다는 사실만 적어 중립적으로 적은 이곳에는 가브릴로의 살해 현장 사진과 체포, 재판의 사진 등이 있어 그때의 상황을 희미한 옛 사진으로 다듬게 합니다. 사진은 보스니아어, 영어, 독일어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AIII 118번호판과 MUZEJ SARAJEVA라 쓰여진 Tag의 검정 자동차도 다리 옆길에 멈춰 있었습니다.
1914년의 군대 사진과 1918년의 많고 많은 십자가는 묘지 사진으로 하얀색 십자가는 이슬람 상징이고 검은색 십자가는 정교도 상징이랍니다.

돌길로 다듬어진 라틴교에 아침 햇살이 차분하게 내립니다. 분주하지 않은 이 다리에는 녹이 슨 사랑의 자물쇠들이 여러개 엉기어 잠겨 있습니다. 밀야츠카 강 오른쪽으로 밝은 주택가와 건너편은 강 따라 가로수가 가지를 늘어뜨린 산책로가 한가롭습니다.
이 역사에 남을 사건으로 세르비아는 러시아에게 도움을, 오스트리아는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합니다. 결과적으로 세르비아 사건 한달 후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로 구성된 3국 동맹과 영국, 프랑스, 러시아로 구성된 3국 협상이 서로 대립합니다.
바로 유럽중심의 세계 1차 대전(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 11일) 입니다. 후에 중국, 일본도 참여합니다. 군인 900만 명과 민간인 50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불구가 된 군인도 700만 명 이상이었다는 전쟁 이야기, 발칸에서 필자는 전쟁이야기만 듣고 또 전합니다.

이 시기에는 민족주의 가 팽배하였고 발칸반도는 슬라브계와 게르만계가 맞닿아 있었기에 화약이 터져 유럽의 화약고라는 이름이 붙여진 것입니다. 독일은 영국, 프랑스와의 식민주의 경쟁에서 후발 주자였기 때문에 전쟁을 감행한 것은 아닐까요? 제국주의, 식민주의, 민족주의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그 시대의 상황이라고 할까요? 국경이 이웃인 국가들의 분쟁은 역사적으로 자주 일어나 당연하다고 할까요? 패전국이 된 독일은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하였고 독일의 해외 식민지들은 대부분 독립합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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