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mes Edward Adams. 2. May. 1867 – 25. Jun. 1929 (Entering Korea in 1895)


1897년 말, 대구에 온 가족과 어학 선생, 임시 보모 등 7명을 교인으로 남문안 교회(현 대구제일교회)가 창립되었다.

10여 년간 대구의 사역은 건강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지나갔다. 1918년이 되자 아담스 선교사는 사역의 복병을 만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역자들의 복병은 언제나 안에서 찾아오는 법이다. 건강이 적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특히 신경쇠약으로 오는 정신질환은 사역의 큰 장애가 되었다. 그렇다고 산적한 일들을 하루아침에 내려놓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건강 문제는 그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끔 몰아갔다. 진실로 원치 않았지만 선교지부에 사임서를 제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아담스 선교사가 없는 대구는 상상할 수 없었기에 사임 결정은 쉽게 처리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아담스 선교사는 귀국하였다. 여러 의사들을 만나서 진료와 치료를 받았다. 한결같이 스트레스와 과도한 업무를 중단하지 않으면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다고 충고를 하였다. 다시는 한국에 가서 사역하면 안 된다고 하였고, 만약 그 일을 계속한다면 목숨까지 위험하다고 경고하였다.
하지만 요양 중에 있던 아담스의 대구 사랑은 식을 줄 몰랐다.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이 계성학교 교장이 공석으로 있다는 점이었다. 그는 요양 중에도 자신이 직접 교장 적임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그가 생각하는 교장은 목사 안수를 받은 자로, 수학과목을 어느 정도 교육받은 대학 졸업자이어야 하며, 또한 교육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계성학교는 대구 선교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기관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당시 계성학교는 대구·경북지방의 유일한 기독교 학교였고, 장차 교역자가 될 사람들과 지적인 평신도 지도자를 양성하는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선발된 사람이 계성학교 제5대 교장으로 사역했던 핸더슨(Harold H. Henderson, 玄居善) 선교사이었다. 핸더슨 선교사는 1893년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 출생으로 워싱턴대학과 프린스턴 신학교를 졸업한 후에 1918년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임명받았다. 1920년 10월에 대구에 부임한 이후 1941년 귀국 하기까지 계성학교를 학교다운 학교를 만든 참된 교육가였다. 아담스 선교사의 사람 보는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 주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담스 선교사는 병을 핑계로 미국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없었다. 그의 마음은 항상 대구에 있었다. 건강이 조금 호전되는 기미가 보이자 그는 지체하지 않고 즉시 선교 현장으로 복귀하였다. 1920년 9월이었다. 2년여 동안을 요양한다고 했지만 그의 건강은 이전과 같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대구선교지부의 일원으로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과거처럼 조직 속의 일원으로 많은 업무를 감당할 수도 없었고, 다시 시작하는 사역의 적응조차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슴 아픈 일이었지만 선교회를 사임하고 독립적으로 사역할 수밖에 없었다.

아담스 선교사는 5명의 유능한 유급 조사를 확보하였다. 이들은 우선 교회 없는 지역으로 파송되어 새로운 교회들을 설립하는데 전력하였다. 그 결과 한 달에 6, 7개 교회가 새로이 설립되었고, 수백 명의 새 신자들이 생겨났다. 물론 기존 교회에서 5km 이내에는 교회를 세우지 않았다. 그리고 세워진 교회는 그 지역의 관할 선교사의 감독으로 이양하거나, 장로회 관할구로 넘어갔다.
1922년이 되자 아담스 선교사의 건강은 또 다시 흔들렸다. 에드만 박사로부터 치료를 받았는데 역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 휴식이었다. 하지만 아담스 선교사는 미국에서 편안하게 치료를 받는 것보다 선교 현장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끝까지 할 수 있기를 진실로 원했다. 약함 속에서도 사역은 계속 확장되었고, 세워진 몇 교회에서 일천 사백명이나 등록하는 성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들 교회를 돌보는 것이 그에게는 생명보다 더 중요하였다. 때로는 자신의 약함이 선교에 장애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렇다고 목자가 양들을 뒤로하고 쉽게 뉴욕으로 갈 수는 없었다.
하지만 1924년이 되자 아담스 선교사의 건강은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다. 미국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번에 돌아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을 직감한 그는 자신의 모든 사역을 선교 일선에 복귀한 두 아들에게 일임하였다. 안동의 사역은 차남인 벤자민(Benjamin)에게, 그리고 대구는 장남인 에드워드(Edward)에게 인계하였다. 자녀들이 직접 선교의 후계자가 된 것이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1929년 6월 25일, 캘리포니아 버클리에서 아담스 선교사는 6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동료 선교사 부해리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지혜, 그의 충성, 그의 열정은 동료 선교사들과 한국인 형제들에게 한결같은 영감이 될 것이다.”
당시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의 3대 선교 거점은 평양, 서울, 대구였으며, 그 대표 선교사로는 마포삼열(Samuel Austin Moffet, 1864~1939 馬布三悅) 선교사, 원두우(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元杜尤) 선교사, 안의와 선교사라고 할 정도로 한국 개신교회사에서 그 비중이 매우 큰 인물이다. 그의 장남 안두화(安斗華) 목사는 계명대학교의 창설자로서 대구에 오랫동안 주재하였다. 이처럼 안의와 선교사의 후손들도 모두 한국을 위해 헌신 봉사하여 많은 업적을 남겼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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