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ene Bell. Apr. 1. 1868~Sep. 28. 1925 (Entering Korea in 1895)

한국에 온 선교사 가문 중 특히 두 명문가가 있는데 언더우드 가(Underwood Family)와 유진 벨 가(Bell Family)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북장로교가 파송한 대표적 선교사였고 벨 선교사는 남장로교가 파송한 대표적 선교사이다.

이 두 가문의 공통점이 있다면 4대에 걸쳐 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더우드 선교사가 1891년 첫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가게 되었는데 한 가지 목적은 조선(한국)선교에 대한 보고였고 다른 한 가지는 조선(한국)으로 올 선교사를 모집하는 일이었다.

언더우드 선교사는 테네시 주 내쉬빌에서 열리는 전국 신학생 선교연맹 (Inter-Seminary Missionary Alliance)에 참석하여 조선(한국) 선교를 호소하였다. 이 호소가 영향을 주어 전킨 등 선교 지원자가 생겨났고, 남장로교는 조선(한국)에 선교사를 1892년 7명을 파송하고 뒤이어 1895년 4월 9일 유진 벨 선교사와 오웬 선교사를 제2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된다. 이때 유진 벨 선교사는 27세였다.

배유지 선교사(1868.4.1~1925.9.28 裵裕祉)는 미국 켄터키주 스코트 선교구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소속 목사로 1893년 내한하였다.

1891년 켄터키(Kentucky) 주 센트럴대학(Central University)을 졸업하고, 1894년 켄터키 신학교(Kentucky Seminary)를 졸업하였다. 목사안수를 받고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의 파송을 받아 서울에 도착해 전남선교부가 설치된 나주에 부임하였다.

그해 9월 6일 나주읍에 최초로 나주장로교회를 설립했다. 그러나 이곳의 유림(儒林)들과 양반들의 텃세가 심해 외국인에 대한 반발이 커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1897년 10월 1일 서해안에 새로 개항된 목포로 선교기지를 이동해 이듬해 목포선교지부를 개설하였으며, 뒤따라 부임한 의료 선교사 오웬(Clement C. Owen 吳元) 및 여선교사(Straffer, Fredrica) 등과 함께 전도 및 부녀자 계몽사업을 시작하였다.

배유지 선교사는 나주로 부임하기 전에는 하위렴(W.R.Harrison) 선교사와 함께 서울에서 조선어 훈련을 먼저 받았다. 배유지와 오웬 선교사는 나주에서 목포로 이동, 새로운 둥지를 잡고자 선교사역을 착수했으나 나주에서처럼 향교를 중심한 유림들과 양반들의 텃세 때문에 정착하는데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할 수 없이 그들은 변두리로 밀려나 유달산이 바라다 보이는 목포 양동 공동묘지 끝자락에 자리를 잡고 겨우 선교사들의 주택과 교회당을 겸해서 사용할 수 있는 거처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웬은 목사이면서 의사였기 때문에 목포진료소를 설치할 수 있어 이를 매개로 주민들을 상대로 진료에 임할 수 있었다. 이곳 진료소를 찾는 이들은 주로 해남, 진도, 완도, 강진, 장흥 지역민들이었는데 그 이유는 오웬이 이 지역들을 순회하면서 목포진료소 소식이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소문이 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선교방법의 일환으로 응접실을 설치하고 변창연(邊昌淵)으로 하여금 관리하게 하면서 결신자들을 위한 상담실 역할을 하게 하였으며 1900년 3월 5일 4명의 원입교인(原入敎人)으로 최초의 목포교회(木浦敎會)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였다. 그해 여름에 이르러서는 30명의 세례(洗禮) 지원자 중 6명이 문답에 합격해 세례를 베풀었고, 8명의 원입교인이 증가해 꾸준히 발전하여 갔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1901년 4월 순회전도 여행 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해, 배유지 목사는 부인(Lottie Withespoon Bell, 裵周良)을 잃었다. 그는 두 자녀를 데리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가 1902년 가을에 다시 내한하여 목포지부에서 선교사역을 계속하고 있었는데, 1903년에 이르러서는 목표교회 교인수가 계속 증가하여 200명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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