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gene Bell. Apr. 1. 1868~Sep. 28. 1925 (Entering Korea in 1895)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로 내한

배유지 선교사는 200명 이상의 교인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그는 석조(石造) 예배당을 계획하고 목포교회 신축계획을 세우고 예배당을 완공하여 이곳 목포선교지에서 별세한 그의 부인을 기리기 위한 의미를 부여 기념 교회당이라 명명하였다.

이때 당시 목포 인근에는 이미 6개의 예배처소가 세워졌고 100명의 원입교인이 확보된 상태였다. 이리하여 1904년 봄에 개최된 선교연회(Mission Conference)에서 광주선교부(Mission Station)를 개설하기로 결정하였다. 배유지 목사는 광주선교부 책임자로 결정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광주가 앞으로 행정구역 위치로 보아 전남지방의 중심 도시로 발전될 것을 예견하고 광주지부를 신설할 것에 대해 꿈을 꾸어 왔고, 오웬과 함께 1904년 12월 성탄절 아침에 광주군 효천면 양림리에 첫 광주교회(光州敎會, 현 광주제일교회)를 설립하였다.

1904년 12월 성탄절을 맞이해 그 축하예배를 자신의 사택 사랑방에서 집례함으로 광주지역 선교의 포문을 열었다. 이 모임은 1905년 1월부터 기도회(Pray Meeting) 모임으로 발전하였고, 점차 교인수가 증가하게 되자 북문안(北門內)에 첫교회를 세운 것이 오늘의 광주제일교회의 전신이다.

6년 후 1910년에는 교인 총수가 500명을 기록하였다. 1908년 그의 사랑방에서 몇 사람의 여학생을 모아놓고 이듬해엔 남학생까지 모집해 성경을 가르친 것이 시초가 되어 오늘의 수피아여학교와 숭일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가 세운 교회는 광주제일교회(양림동 소재)를 비롯해 송전교회, 장성군 모생리교회, 해남군 우수명교회, 곡성군 옥과리교회, 장성군 소룡리교회, 순창군 쌍계리교회, 해남군 신덕리교회, 장성읍교회, 광주월성리교회, 담양읍교회 등 수없이 많아 배유지 선교사야 말로 호남선교의 대부라 할만한 선교열매를 거둔 선구자였다. 뿐만 아니라, 배유지 선교사는 수년동안 평양장로회신학교 교수직을 감당하며 초기 한국교회 지도자 영성에도 크게 기여하였으며, 광주기독병원(당시 제중병원) 탄생에 산파역도 감당하였다.

1911년 10월 15일엔 전주에서 개최된 전라노회 창립노회 부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1914년 황해도 재령 남산현교회(南山峴敎會)에서 모인 제3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에서 총회장으로(선교사 총회장으로는 세번째) 피선되었다. 총회장으로 당선된 배유지 선교사는 이미 광주선교부를 신설하고, 1908년에는 숭일학교와 수피아여학교를 세워 교회와 국가를 위한 인재양성에도 큰 공을 세웠다. 그가 재임했던 장로교총회 중요결의 안건을 보면 △길림성과 만주지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하다. △주공삼씨를 동경연합교회(현 동경한인교회) 선교사로 파송하다. △조선기독교청년연합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다.

배유지 목사는 이 땅에 와서 두번째의 개인적인 아픔을 겪었다. 그것은 그의 둘째 부인(M.W. Bell)이 3.1운동 당시 경기도 화성 제암리교회 참상을 취재한 후 귀가 길에 교통사고로 순직한 일이다. 이러한 와중에도 선교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전라도지방 선교에 헌신, 전도자의 열정을 불태웠다.

배유지 선교사 자신도 격무에 과로로 결국 1925년 9월 28일 광주선교부 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안한 모습으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의 자택이었던 양림동의 집은(2층 양옥) 현재까지 <벨기념관>으로 남아있다. 유족으로는 3남(Henry, Euqene, William) 1녀를 두었는데, 딸은 남장로교 선교사였던 린턴(W .A Linton)의 부인이 되어 군산에서 선교하였다. 대전에 있는 한남대학교의 설립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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