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N. Blair. 1876. 7. 11. - 1970. 5. 2. (Entering Korea in 1901)

방위량 선교사는 1901년 9월 내한하여 1949년 대구선교부에서 은퇴하기까지 48년 동안 조선(한국)에서 사역했던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이다. 1876년 7월 11일, 블레어 선교사는 미국 캔자스(Kansas) 주 샐리나(Salina)에서 출생했다. 웨슬리안 대학과 맥코믹 신학교에서 수학한 그는 1901년에 북장로교 선교부로부터 임명을 받았다. 블레어 선교사의 우리말 이름은 '방위량(邦緯良)'이다. 선교에 대한 큰 꿈이 없었던 방위량 선교사는 안식년 기간 중 모교를 방문한 소안론(William L. Suallen) 선교사의 도전을 받고 한국행을 결심하게 된다.


그가 한국에 선교사로 지망하게 된 동기는 좀 특별하였다. 1901년 평양 주재 선교사였던 소안론 선교사가 미국 시카고를 방문하였다. 그때 방위량 선교사는 신학교 4학년 학생으로서 졸업을 앞두고 있었는데, 어느 월요일 저녁 소안론은 학생들 앞에서 선교에 대한 특강을 하였을 때, 특별한 감흥은 없었지만 소안론 선교사가 그날 밤 자정 방위량 숙소에 찾아와 그에게 도전하길, “블레어, 조선(한국)에 가보지 않겠나?” 그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어 거절하였으나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그것은 그의 인생의 반려자인 에디스가 허락하면 결심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방위량의 생각에 적극 동의해 주었고, 그 사건으로 결국 조선(한국)에 선교사로 내한하게 되었다.

그는 1907년 “평양대부흥회” 당시 부흥회의 설교자이며 인도자였고, 1909년부터 일어난 “백만인 구령운동”과 1919~1935년의 “기독교 진흥운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조선(한국)교회의 개척사업과 기독교 교육사업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으니 장로회 평양선교부를 중심으로 한 서북지역의 5개군을 관할하며 순회전도사역을 하면서 57개의 교회를 개척하였고, 1901년부터 숭실학당(Soongsil Academy)과 평양신학교, 교회의 주일학교에서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다.

방위량 선교사는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건축 기금 모금을 위해 봉사하였고, 평양대부흥의 현장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다. 그는 사위 한부선(Bruce F. Hunt) 선교사와 『한국의 오순절과 그 후의 박해』(The Korean Pentecost and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를 공저했다. 그가 1907년 1월 12일, 장대현교회에서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을 본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의 한 지체'라는 제목의 설교를 전하자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일 후, 선교사님을 미워했다며 눈물로 회개하는 성도 앞에서 방위량 선교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바지, 아바지”만 되뇔 뿐이었다.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일어나서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고꾸라져 울었다. 그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죄인이라는 완전한 고통 속에서 주먹으로 바닥을 쳤다. 그리고 나서 바닥에 엎드려 울고 또 울며 거의 고통 중에 부르짖었다. 때때로 회개의 고백 후에 모든 회중이 통성기도를 했다. 수백 명의 회중이 통성기도를 한 효과는 무어라고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다시 회개의 고백 후에 그들은 참을 수 없는 울음을 터트렸고 모두 함께 울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모임은 기도와 고백과 눈물로 새벽 2시까지 계속 되었다.

“회개는 결코 죄를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는 데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배상할 수 있으면 배상했고, 그로 인해 평화가 찾아왔다. 수년간 우리에게서 훔쳐갔던 물품과 돈을 돌려받으면서 우리의 마음은 찢어지고 또 찢어졌다.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기가 힘들었다. 평양 전역의 사람들이 집집마다 다니면서 자신들이 입힌 손해를 고백하고, 훔친 재산과 돈을 돌려주었다.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에게도 그렇게 했고, 온 평양이 동요했다. 한 중국 상인은 어느 그리스도인이 찾아오더니 수년 전에 부당하게 돈을 많이 받았다고 하면서 그 돈을 돌려주자 몹시 놀랐다.”

방위량 선교사는 평양 장대현교회 부흥회 직후 그리스도인들이 말로만의 회개가 아니라 자신들의 죄를 갚기 위해 어떻게 했는지를 기록하면서 “성령님께서 사람의 죄를 깨닫게 하시면, 그는 교회 앞에 자신의 마음을 내려놓고 할 수 있는 대로 배상하기 전까지는 낮이든 밤에든 평안을 얻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장대현교회를 필두로 교회들마다 그리스도인들의 회개가 일어났고, 그것은 “죽을 것 같은 분투 속에서 자신의 본성이 완전히 깨진” 상태에서 이뤄진 참된 회개였음을 전하고 있다.(방위량 선교사 저 The Korean Pentecost 중에서)

1930년대 후기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에 따른 탄압과 박해를 받는 가운데에도 블레어 선교사는 결연히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1942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출국 당해 미국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02년부터 숭실학당에서 체육과 음악을 가르쳤고, 1908년과 1920년에는 미국에서 모금활동을 전개하여 숭실대학(Soongsil Union College)과 평양신학교의 건물을 신축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숭실대학의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였고, 숭실대학이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자진 폐교할 때에는 재단이사장으로 학교 운영과 폐교절차를 진행하는 등 숭실대학의 교육, 행정에 직접 참여한 경영자이기도 하였다. 해방 후 재입국해 평양지역 교회들을 재건하려 했으나 소련의 방해로 모든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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