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먼저 사모님 소개를 좀 해주시겠어요? 예수 믿으시게 된 이야기를?


저는 기독교 가정이 아닌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를 광주에서 다니게 되어 전학을 갔는데 그 학교가 미션 스쿨이었어요. 그리고 저희 엄마는 신자가 아니셨지만 엄마의 오빠되시는 외삼촌 가정이 믿는 가정이었어요. 언니와 저는 방학 때만 되면 늘 외가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했었는데 10살 때인가, 그 때도 외가에 있을 때인데 외가집의 언니, 오빠들이 늘 새벽예배를 가길래 저도 함께 따라다니곤 했습니다. 당시 여름성경학교에서는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성경구절을 외우면 연필이나 노트같은 상품을 주더라구요. 그때는 그런 것을 받는 재미로 말씀을 암송했는데 그것이 말씀 암송을 시작한 계기가 되었어요. 그렇게 예수님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는데 결정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된 동기는 언니가 신학생과 결혼하게 되면서부터 입니다. 그리고 형부가 신학교 친구를 소개시키셔서 지금의 남편(세광침례교회 최기철 목사)과 결혼하게 되었구요. 사실 사모의 소명도 없이, 선교사로서의 소명도 없이… 한 마디로 준비가 안된 사모였습니다.(웃음)

결혼하신 후 선교사로서 사역에 대해 말씀해주세요.


여름성경학교에서 상을 타려고 암송했던 성경구절들, 미션스쿨을 다니면서 점수를 더 따기 위해 암송했던 성경구절이었지만 나중에 목회를 하면서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결혼하고, 남편이 아직 전도사였는데 인근의 부대에 군목이 없어 주일에 설교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목회의 시작을 처음부터 담임 전도사로 하게 된 것이죠. 그리고 부산의 영진침례교회를 섬기다가 필리핀 선교사로 떠나게 되었습니다. 필리핀 선교를 갔는데 그 때만해도 저에게 선교의 사명이 없었기 때문에 남편이 유학을 간다고 하길래 그냥 따라갔어요. 유학생이라고 생각했는데 가서 보니 선교사더라구요. 그러면서 선교라는 것을 처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목사님은 거기서 M.Div 공부를 하셨고, 저는 음악을 공부했습니다.

1990년도에 필리핀에 7.6 강도의 지진이 온 적이 있어요. 당시 2만5천명의 사람들이 죽었던 큰 지진이었습니다. 저는 세 살된 아이를 데리고 집에 있었고, 목사님은 월요일에 선교지로 이미 떠나서 목요일에 돌아오는 일정이었어요. 남편의 생사를 알지못하는 상황에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남편이 죽었을 거라며 시체를 찾아주는 사람들도 저를 찾아와 남편을 찾아줄테니 사진을 달라고 하더라구요. 흔들거리는 건물 속으로 사진을 찾으러 들어갔는데 이제 겨우 30대 초반이었던 저는 남편을 찾지 못할까봐 정말 너무나 무서운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그런 두려움과 공포 속에서 아이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와보니 온 세상이 흔들거리면서 끔찍한 괴성들이 들리는데 저는 세상이 어떻게 된 건지, 예수님께서 재림하신 것인지 분간이 안돼더라구요. 그런데 카톨릭 신자였던 한 자매가 저에게 와서 깜짝놀라며 “넌 왜 지금 여기에 있느냐?”고 하는 겁니다. “내가 여기에 있지, 그럼 어디에 있어?” 했더니 하는 말이 “지금 예수님께서 재림하고 계시는데 너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았구나.”라며 남편은 휴거가 되었는데 너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지 않아 아직 이 땅에 남아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말을 딱 듣는데 정말, 정말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아, 이게 정말이구나, 예수님이 재림하시는구나. 우리 남편은 휴거가 되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이구나, 나는 정말 예수님을 잘 못믿었나?'하는 생각이 들자마자 저는 맨 땅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직 구원받지 못한 성도라면 이 순간 주님을 영접하겠습니다. 저를 구원하여 주세요! 하나님 저의 영혼을 받아주세요. 제가 예수님을 저의 구주로 영접하겠습니다” 흔들리는 지진 속에서 전심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저의 구원에 대한 확신을 점검하는 절체절명의 시간이었죠.

그리고 4일만에 목사님이 돌아오시고, 여진으로 아직 모든 것들이 흔들리고는 있었지만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은 돌아왔으나, 지진 속에서 아내와 아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한 후에 “이 죽음의 공포 속에서 예수믿지 않는 영혼들이 그냥 죽어간다.”며 전도를 하러 병원으로 바로 떠났습니다.
지진 후, 첫 주일 예배를 드리는데 하나님께서 세상을 한 번 흔들어놓으시니 그렇게 전도를 해도 오지 않던 사람들이 자기 발로 얼마나 많이 몰려왔는지, 교회 안은 사람들로 빽빽히 차서 들어오질 못하고, 창문 바깥에서 선채로 예배를 드릴 정도였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고, '전도의 역사도 하나님이 하셔야 되는구나'하는 것을 체험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 “저도 선교사가 되겠다. 저 영혼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하고 고백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당신의 마음이 선교사로 변화 되기를 기도했었다. 5년만에 내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이야기 하는 겁니다. 그리고 지진으로 인해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대사관에서 임시여권을 받아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어 목사안수를 받은 후 다시 정식으로 선교사 파송을 받아 필리핀으로 돌아 왔습니다. 그렇게 필리핀 선교사로 사역을 하다가 한국에서 총회 행정목사로 섬겼고, 버지니아의 리버티대학에서 박사과정을 하시면서 이민 목회를 했습니다.

두번째 선교지를 택하시게 된 배경을 이야기해주세요.

사실 저는 목사님이 박사공부가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실 줄 알았어요. 하지만 테네시에서 목회를 하다가 나이를 더 먹기 전에, 한 살이라도 젊을 때, 2차 선교를 하자. 필리핀에서 못다한 선교를 제대로 해보자 해서 2012년 도미니카로 가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이티에 2010년 엄청난 쓰나미가 온 것을 TV로 볼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진다며 우시는 거예요. 우린 저길 꼭 가야한다고 하면서.
저는 필리핀에 있을 때 선교후원이 많지 않아 애기 우유값조차 없을 정도로 재정이 어려웠던 기억이 있어서 IMB(침례교단의 International Mission Board) 파송이면 가겠다고 했었죠. IMB는 생활비를 지원해주거든요. 그렇게 협상을 하는 중에 IMB 파송의 길이 막혀버리고 말았어요. 59세가 선교사로서 커트라인이었는데 당시 미국의 경제사정이 어려워지면서 50세로 낮아지고, 52세였던 남편은 자격이 되질 않았어요. 저는 곧 남편에게 선교사로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우겼지요.(웃음) 제가 필리핀서 그렇게 하나님께 다짐해놓고도, 미국에 살다보니 선교사 시절의 어려움이 두려웠나봐요. 목사님은 저에게 “당신의 우상이 IMB였다”며 “하나님은 내가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고 나가느냐, IMB를 의지하고 나가느냐를 보신다. 그래서 막으셨다. 그래도 가는 것이 믿음이다”라고 해석하시더라구요. 결국은 승복을 하고 선교지로 갔는데도 저는 마음이 열리질 않았어요.

제2의 선교지인 도미니카는 어떠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저희는 도미니카 안에 있는 아이티 사람들을 위한 선교사역을 합니다. 도미니카의 사탕수수밭을 일컫는 '밧데이'라는 곳 안에 아이티 노예들이 사는 집이 있는데 여기서 '예수'영화를 상영하려고 핫도그를 2백개 정도 준비해갔어요. 거기는 돼지, 소의 분뇨 냄새로 악취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곳이었어요. 당시 저는 하나님과 계속 씨름을 하는 시간 중이었고, 다시 돌아갈 생각에 짐도 안 푼 상태였는데 일단 하비자란 지역 밧데이를 처음 방문했습니다. 도미니카공화국은 사탕수수 농사를 위해 아이티 정부로부터 노예(지금은 일꾼)들을 고용해 일을 시키고 있습니다. 전기가 안들어오니까 자동차 배터리를 이용하여 영화를 상영하는데, 상영 전에 핫도그를 먼저 나눠주어 그들이 모이게 합니다. 한 사람을 주니 온 동네 사람이 다 모이는 겁니다. 핫도그를 만들어 케챱을 뿌려주는데 그 사람들은 평생 처음으로 핫도그를 먹어보는 거예요. 노인이고, 임산부고 모두 처음에는 줄을 잘 서더니 핫도그가 점점 줄어드는 것을 보더니 싸우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때 제 눈에 띈 것은 어떤 남자가 여자 아이를 주먹으로 마구 때리는 겁니다. 앞으로 못가게 한다고요. 핫도그 하나를 먹기위해 앞의 아이를 때리고 있는 것을 보는 순간 제가 너무 울었어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얘기했죠. “하나님, 왜 저 광경을 보여주시는 것인가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 아이들을 사랑하라”시며, “저 백성도 나의 백성이다.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저들도 내가 사랑한다. 저 백성을 위해서 너를 쓰고 싶다.”는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또 그랬죠. “하나님, 저는 언어도 안돼요. 돈도 없어요. 지금 후원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저더러 여기서 살라고 하시면 살겠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 사는 동안에는 얘네들이 영으로나, 육으로나 배고프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지요.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돌아오는 차 안에서도 저는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핫도그를 차지하기 위해 맨발로 싸우는 그 아이들이 눈에 선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다음 날부터는 제가 완전히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목사님에게 밧데이를 가자고 매일 졸랐습니다. 그렇게 다니며 한 사람, 한 사람 전도하기 시작했고, 생각지도 않았던 후원자들이 연결되면서 재정의 쪼들림도 펴지기 시작했습니다. 한 분은 밀렸던 아파트의 렌트비를 포함 일년치를 내주셨고, 선교팀이 오면 그들의 도움으로 쌀을 사서 동네 아이들을 먹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귀와 입을 열어 주셔서 50이 넘은 제가 언어를 습득하게 하시는데 엄청 빠른 속도로 언어가 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목사님은 성인사역을, 저는 어린이들을 위한 사역을 했습니다.
헌 옷가지들을 나눠주면서 사람들을 모으고, 그 다음 주부터는 모여진사람들에게 성경공부를 시키고, 사람들이 모여져서 정식으로 공간이 필요하면 교회를 개척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없는 또 다른 지역에 같은 방법으로 교회를 세워갔습니다. 그리고 건물이 필요한 시점이 되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도움의 손길을 펴주셨어요. 얼굴도 모르는 분인데
선교지에 교회를 개척하고 싶다며 지인을 통해 헌금해주시기도 했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교회들이 지금은 모두 25개 교회가 건축이 되었습니다.

애틀랜타로 오시면서 선교사역은 어떻게 진행되고 계신가요?


2017년 10월 1일 목사님이 세광교회의 담임으로 부임했는데,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아이티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셔서 선교사역은 맡긴 분들을 통해 계속되고 있습니다. 도미니카에 아이티 교회 총회가 없어요. 교회들은 점점 많아지니까 신학교도 필요하여, 미국서 목사님들이 오셔서 강의를 하시면서 3년을 가르치십니다. 3년을 수료하면 목사 안수를 주는데 신학교에는 보통 100명~ 120명씩 모입니다. 지금은 총회의 총회장이 있어서 3층 건물의 센터에 1층은 총회장이 담임하는 교회, 2층은 방문자의 숙소, 3층은 총회장의 가족들이 살고 있습니다. 총회 소속에 52개 교회가 있어서 그들을 후원도 하고, 선교팀들이 가면 선교사역과 함께 교회를 건축해주는 일도 하고 있습니다.

이번 펜데믹으로 그곳 상황은 더 안좋겠어요.
펜데믹으로 인해 통행금지가 생기고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많아 힘들지요. 아직도 저의 기도가 유효한지 쌀을 사주라고 헌금하시는 분들이 많아 계속 쌀을 사서 보내주는 일들을 하고 있습니다. 동네사람들이 쌀을 받으러 왔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가는 이들도 있구요.
세광교회의 성도님들이 선교지를 물심양면으로 돕고 계셔서 너무 감사해요. 밧데이의 하나님께서 저를 써주신 생각을 하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요나처럼 그렇게 피해가고 싶어하던 저였는데…..

아이티의 선교에 동참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습니까?


1대1 매칭 펀드로 한 아이를 후원하는데 한달 35불이 필요합니다. 아이티에서 넘어온 아이들이 도미니카에 신분이 없으면 공립학교를 갈 수가 없기때문에 사립학교로 가야 해요. 그런 아이들의 학비과 학용품, 신발, 식비 등…이런 것들에 쓰이게 되지요. 신학생들을 도우시려면 월 50불로 후원이 가능하구요. 현재 아이들은 13명, 목회자들은 15명이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혹시 또 도우실 수 있으면 쌀이 주식인 아이티 사람들에게 배급할 수 있는 쌀을 사주시면 좋겠어요. 쌀은 10파운드에 6불 정도 합니다.

오늘 정말 많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사모님을 부르시고, 쓰셨던 하나님께서 계속해서 사모님을 큰 일꾼으로 쓰시기 바랍니다.

도하미션(도미니카·하이티) Tel : 678-707-1981 Email : joym0191@gmail.com

대담 이윤태 발행인·정리 한상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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