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되신 동기를 말씀해주세요.


고등학교 2학년때, 한얼산 기도원에 전가화 목사님이라는 분이 부흥회를 하는데 어머니가 같이 가자고 하셨어요. 그래서 믿음도 없는 제가 따라가게 되었어요. 그런데 그날 어머니께서 입신하셔서 만 하루만에 깨어나셨어요. 당시 성도들의 방언과 뜨거운 기도가 너무나 이상해 보였지만 어머니의 입신을 보면서 저도 기도하게 되었고, 첫 기도였는데 주의 종이 되게 해달라고, 이왕이면 선교사가 되게 해달라고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제가 외아들에 장손이었거든요. 어머니께서 너무나 걱정을 하시길래 도로 물러달라는 기도도 했으니까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물러달라는 기도는 안들어주시고, 저를 선교사로 쓰신 것이죠.

볼리바아로 가시게 된 동기와 언제부터 사역을 시작하셨는지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선교사로 하나님께 서원을 했었고, 제 생각에는 아프리카 보츠와나에서 사역을 하려고 했었어요. 선교지를 놓고 기도할 때, 직접 가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에서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여행을 했습니다. 보츠와나는 순전히 제 생각으로 정한 선교지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끄시는 선교지가 어디인지 확인하고 싶었어요. 신학생 그룹과 함께 케냐, 탄자니아, 우간다, 방글라데시, 태국, 호주, 파푸아뉴기니아 등 여러나라를 다녀 보았습니다.

특별히 아프리카에서 저에게 참 많은 감동이 있었습니다. 칠레의 산티아고는 정작 저 혼자 가게 되었는데 산티아고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너무나 뜨거운 마음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뜨거운 마음을 주셔서 '아, 하나님께서 여기를 나의 사역지로 원하시는구나'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보츠와나를 사역지로 정해놓고 준비하던 저는 전적으로 계획을 바꾸어 칠레로 가게 된 것이죠. 수도 산티아고로부터 약 1000km 정도 떨어진 곳에서 사역을 했습니다.
1998년 7월 3일 한국을 출발하여 칠레에 도착했고, 계속 거기서 사역을 하다가 2012년부터는 볼리비아에서 사역을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오랜 칠레의 사역을 접으시고, 볼리비아로 가시게 된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칠레에서 현지인과 협력하며 개척 사역을 했었는데 부흥이 되자 주변 목회자들이 우리를 이단으로 생각하더라구요. 그 때 한참 통일교의 교세가 확장할 때였는데 저희를 통일교 소속이라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래서 기존의 정통 교단과 협력을 해야겠다고 생각해서 칠레 자유감리교단과 협력관계로 일을 했습니다. 그 때 감독님께서 볼리비아에 교회를 개척했으나 관리가 잘 안되어 교회가 와해가 된 상태였어요. 두 나라의 교회들을 관리하다 보니까 힘에 부치셨는지 기도 요청을 먼저 하셨고, 기도 응답으로 저희를 지목해주셨다고 볼리비아로 가서 좀 도와주라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2012년 볼리비아로 가게 된 것이죠.

선교사님은 어디서 공부를 하셨어요?

저는 감리교 신학대학원에서 선교학을 공부 했습니다.

파송은 어느 교회에서 받으셨어요?
임마누엘 감리교회로부터 파송받았습니다. 저 자신도 그 교회 출신이고요.

볼리비아 사역에 대해 소개해주시죠.


저희 사역은 주로 개척사역, 즉 처치 플랜팅이죠. 지역 전도를 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선교 시스템인데 당시 저희 아이들, 여동생과 조카들까지 같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기타도 치고, 노래하는 찬양사역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남미에서 선교를 하려면 일단 찬양사역이 잘 갖춰져야 무난하게 시작할 수 있게 되거든요. 당시 예배 장소를 내준 현지인 가정의 집 밖에서 한 달여간 속회를 드리다보니 마을을 향해 부르는 찬양소리를 듣고 이웃 사람들이 나오는 거예요. 6개월이 지나니 120여 명이 모이더라구요. 그래서 또 교회를 세우게 된 거죠. 그런 식으로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죠.

그럼 지금까지 몇 개의 교회를 세우셨어요?

산타크루즈에는 네 곳의 교회가, 이번에 다섯번째의 교회를 세웠는데, 80마일 정도 떨어진 산악지역에 산악교회를 세웠습니다.

산악교회라는 것은 어떤 교회를 말씀하세요?


산타크루즈는 해발이 400m정도 되는데 라파즈 쪽으로 올라가면 산이 아주 가파릅니다. 그곳에 교회를 시작을 했지요. 산타크루즈의 선교팀들이 버스를 빌려서 중앙광장에서 전도집회를 하면서 결단과 서원을 요청하면서 전도집회를 시작합니다.

선교하시면서 사역 현장에서 감명 깊었던 순간이 있었다면 소개해주세요.

선교를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 영혼이 구원받는데 그 영혼을 통해서 어쩌면 세계가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되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어요. 외국인으로서 저는 협력 선교가 가장 좋은 접근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저는 사실 하나님께 개척을 하기를 서원했었습니다. 칠레 뿐만 아니라 남미는 이미 100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를 가진 나라와 사람들입니다. 한국 선교사의 눈으로 바라볼 때 그들의 기독교가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지, 그들 자신은 이미 100년이 넘는 기독교 역사와 문화의 바탕이 굳어진 상태이거든요. 그렇기 때문에 그걸 깬다는 것은 어렵고, 힘들고, 불협화음을 일으킵니다. 현지에 있는 사람들은 선교사를 통해 뭔가 얻으려는 마음이 있고, 선교사는 좀 더 빨리 열매를 얻으려는 생각때문에 불협화음이 생기는것이죠.

저희는 선교의 사명을 받고,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고 결단을 한 청년들이 신학교를 마치고 교회개척을 나가기까지 시간은 많이 걸렸지만 기다렸고, 그 결과 한 방향으로 집중되는 선교를 했기 때문에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한국서 가져온 기독교 문화나 예배 의식 등이 서로 상충되지는 않았나요?


칠레의 경우, 개신교가 남감리교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굉장히 전통적이고, 보수적이지요. 남녀를 따로 구분하여 예배를 드리게 하고, 여성은 천주교처럼 베일을 쓰고 예배 드립니다.

장수나 사모 : 칠레 안에서는 그런 것이 싫어서 다른 교단으로 파생되어 나온 것이 칠레 교회거든요. 남감리교회서는 성령운동을 별로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사실 남미 사람들은 뜨거운 기질이 있어서 성령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는 이들이 있거든요. 칠레 교회를 보면 상당히 극단적이예요. 극히 보수적이거나, 지나치게 자유롭거나 하지요. 저희는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면서 지혜롭게 중간점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극단적으로 어떻게 다르다는 말씀인가요?

보수적인 교회는 남녀 사이에 발을 치고 따로 앉혀 예배를 드리게 합니다. 박수도 못치게 하고, 여성은 화장도 못합니다. 자유로운 교회는 일단 예배 시간도 저마다 제 각각입니다. 와서도 계속 찬양을 하고, 그 다음엔 성도의 간증도 있구요. 이렇게 진행이 되니 예배 시간이 3시간씩이나 됩니다. 목사님들도 신비주의에 빠져있는 목회자들도 있고요. 우리가 배운 설교는 주석과 본문, 상황 등을 통해 기도하며 준비하는데, 이분들은 그때, 그때 오시는 성령의 감동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죠. 그래서 설교 말씀도 그날, 그 시간에 성경을 펼치고, 펼쳐진 말씀을 성령의 감동으로 설교하는 것이죠. 성령의 감동이 있을 수도 있지만, 어쩌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의 말이 전달될 수 있는 것이죠. 게다가 칠레에는 신학교가 없습니다. 교단별로 운영하는 신학원도 들쑥날쑥한 상황에 있죠.

한 예로, 어느 청년이 뜨겁게 예배도 드리고, 방언으로 기도하면 목회자가 직접가서 목사 안수를 하는겁니다. 너무나 즉흥적인 거죠. 더욱 심한 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안수하여 목회자가 되는 경우도 있어요. 이런 것들을 보면서 '고쳐야 겠다'라기 보다는 중간점을 찾아서 조금씩 변화시키는 것에 선교의 중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칠레에 인가된 신학교가 하나도 없나요?


칠레는 신학교가 갖춰야 할 자격(교수 사례비 등)을 엄격하게 구분해 놓아서 정식으로 인가된 학교는 아직 없습니다. 볼리비아에 나라로부터 인가받은 신학교가 있는 것과 다른 점이죠.

칠레의 크리스찬 비율은 어느 정도 됩니까?


실제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25% 보다 낮은 15-19% 될 겁니다.

벌써 10여 년이 넘게 사역하셨는데, 교세는 어느 정도 되십니까?

지금은 400명 정도를 수용할 수 있는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칠레의 경우 천주교는 상류층, 개신교는 하류층으로 주로 구성되어 있고 중산층이 없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응답받아 2007년, 학교 프로젝트를 시작해서, 유치원 2년과 초등학교 8년 과정을 만들고 임마누엘 국제학교로 문교부에 정식 등록을 했습니다.

볼리비아 사역은 어떠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칠레에서 학교 사역을 하면서 사실 딜레마에 빠지게 되었어요. 삶의 문제에서는 어려움이 없어졌는데 학교 사역을 하니 거기에만 매달려 올인을 하게 되는겁니다. 그러다 보니 선교를 놓치게 되더라구요. 그 시점에서 나의 관심과 부재로 인해 교인들이 줄어드는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여쭈는 와중에 앞서 말한 감독님께서 볼리비아로 갈 수 있겠냐고 하셨어요. 물론 저의 답은 “No” 였어요. 당시 장로님이셨던 아버님께서 교회에서 은퇴하신 후, 아들 선교사와 마지막을 보내시겠다고 어머님과 함께 선교지에 오셨거든요.

아버님께서 권유하시며 “초심으로 돌아가라”고 하신 것이 우리에게는 터닝포인트였고, 그렇게 볼리비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학교사역이 선교사역의 수단과 목적은 될 수 있는데 사람들의 영혼을 다루는 선교와는 거리가 좀 있었어요. 하나의 기업으로 굴러가게 되니까요. 하나님께서 저에게 “여기서 멈춰 있어선 안되겠구나”하는 마음을 주신 것이죠. 초심으로 돌아가라는 아버님의 권면에 돌아서게 된 것이고, “사업가로 남을래?, 아니면 선교사로 다시 시작할래?”하는 근본적인 질문 사이에서 다행히 선교사 본연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3세대(부모님, 동생가족, 정선교사 가족) 10명이 칠레 남쪽에서 아르헨티나 안데스 산맥 4천 고지를 넘어서 3천 마일을 같이 이동했습니다. 지금와서 생각하면 칠레에서 보다 더 큰 축복을 주신 거죠. 우리가 이동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4곳의 교회에 1천5백 명이 다니는 교회가 있는데 그들이 복음을 접할 수 없었겠죠. 물론 하나님은 저희가 아니더라도 일을 이루셨겠지만 우리가 쓰임 받은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볼리비아와 칠레의 선교 사역에서 보는 차이점이 있다면?


칠레는 상당히 이해타산적인 면이 있는 반면, 볼리비아 사람들은 겉은 무뚝뚝해도 마음 속에 따뜻함이 있습니다. 게다가 신앙에 대한 갈망이 있습니다. 볼리비아인들은 가진 것이 없어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자기들의 헌금으로 세운 교회들이 많아요. 걱정스러운 것은 신비주의에 현혹되는 경향이 있어요.

앞으로의 비전은?


펜데믹때문에 힘들기는 하지만 볼리비아 정부는 별로 신경을 안쓰는 것처럼 보입니다. 처음에는 3개월을 움직일 수 없게 차단시켰는데 먹고 살기 어려운 사람들의 반대가 엄청 심했죠. 지금은 아이들이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습니다. '적어도 그 아이들이 죽지는 않게 만들어야 하는데…' 하는 걱정이 있죠. 펜테믹 이전서부터 주일과 주중에 아이들을 먹이는 사역을 했고, 그 아이들을 통해 부모들이 교회로 나오기도 했는데, 지금은 펜데믹 중이라 식재료를 가져다 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식재료를 나눠주다 보니 펜데믹 가운데 교회는 더욱 성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선교사란 무엇입니까?”하는 기도를 지금도 하고 있습니다. 선교사로서의 본질과 목적에 충실하려고 지금도 매일 기도하는 것이죠. 선교사는 선교지로 들어갈 때의 기도도 중요하지만, 그곳에서 다시 하나님께서 가라는 곳으로 나갈 준비를 하는 기도도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이끄시는대로 이동해야 하니까요. 궁극적으로 현지인들을 교육시켜 그들이 교회를 이끌어가는 목회자가 되게 하고 학교 역시 현지인들에게 이양하고 나오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대담 이윤태 발행인·정리 한상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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