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 나의 신앙과 신학
6·25 동란까지
신학교 교사로 사용되는 건물은 조선신궁 앞뜰 우편에 있는, 넓다란 기역자 일본식 다다미 방이었다. 교무실도 없고, 예과 본과의 구분도 없이, 그냥 세 반으로 나뉘어, 다다미에 앉아서 강의를 하고 듣는 것이었다. 옛날 교회당에서 주일 학교가 분반하여 공부하던 식이었다. 사무실, 교무실 등이 있을 리 만무하였다. 기역자로 구부러진 모퉁이가 교회 강단이었고, 그 한 구석에 책상 하나를 놓고, 서무 겸 회계를 맡은 김원일 집사가 앉아서 일을 보았다. 아무 벽도 칸막이도 없는 상태에서 강의를 하다 보니 세 강사의 말이 서로 들리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방바닥에 앉아서 무릎에 노트를 놓고 강의를 받아 적는 것이었다. 경건회 시간에는 모두 강단을 향하여 모여 앉아서 예배를 드렸다.
교무 일체를 교장이신 박 박사가 주관하고, 내가 그 보조역할을 했다. 일 년 후에는 제 1회 졸업생인 김동수 목사가 사무 보조를 하였고, 그를 뒤이어 박학래 목사가 그 일을 맡았다. 구약을 김치선, 김진홍 두 목사가 가르쳤고, 신약은 권세열 선교사가, 그리고 유호준 목사가 신약신학을, 유기천 박사가 법학개론을, 홍붕희 교수가 자연과학을, 기타 이정로, 이덕흥, 황선희, 강신명, 김양선 등이 시간 강사로 한 과목씩 맡았다. 영어를 한태동과 현수길이 가르쳤다.
나는 개교 첫 학기에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가르쳤고, 초보 영어도 가르쳤다. 김진홍 목사가 오신 후에는 그가 히브리어를 맡았다. 어떤 때에는 내가 한 주간에 25 시간을 강의하는 경우도 있었다. 점심을 굶는 경우도 많았다. 남산 중턱에 음식점도 없고, 누가 도시락을 싸주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내가 가르치는 헬라어와 영어 반에는 처녀들도 몇 사람 있었다. 겨우 24세를 넘은 나, 총각 선생에게, 간접적으로 청혼하는 학생들도 있었다. [내 여동생 정연(貞姸)이를 통해서] 그러나 나는 30살이 되기 전에는 결혼을 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異性)에게 눈을 팔지 않았다.
그런 만혼(晩婚) 결심을 하게 된 데는 이유가 있었다. 8·15 해방 전에 내가 평양신학교에 다닐 때였다. 왜정 말기여서 일본제국이 한국 남자들을 징용하여 노동을 시키고, 학도병으로 끌어가고, 갑자(甲子)생들을 징병하여 전선에 내 보내고, 젊은 여자들을 이른 바 정신(挺身)대로 끌어가는 시기에, 나는 갑종합격을 하여 일본 해병대(水兵)로 끌려갈 날을 기다리면서 신학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때 평양신학교 졸업반에 김은석이라는 분이 계셨고, 그는 내 부친과 숭실대학 동문으로 서로 가까운 사이었다. 그런데 그 김 목사님께 묘령의 딸이 있었고, 그는 평양에 있는 성화 고등성경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내가 평양신학교 기숙사에 있을 때, 그 여학생이 지나가는 것을 한 두 번 본 적이 있었다. 단발머리의 자그마한 학생이었다. 그 이름이 김신자라고 알고 있다. 제 부친과 김은석 목사께서 당사자인 나의 의견은 들어보지도 않고, 어른들끼리 사돈을 맺으면 어떻냐는 생각을 하며, 맞선을 볼 날자를 잡아놓았던 것이다. 그 때에 제 부친이 겸이포(지금의 송림) 중앙교회를 시무하실 때였는데, 하루는 저더러 김 목사 댁으로 자전거를 타고 선을 보러가자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김 목사님 댁이 평남 진남포 부근 강동이라는 곳이니까 상당히 먼 곳이었다. 그야말로 금시초문이고, 마음에 아무런 끌림도 없는 처지인데다, 마침 그 날 아침에 비가 억수로 퍼붓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안 가겠다고 거절을 했다. 그러니 아버지도 어쩔 수 없어서 단념하셨던 것이다.
그 후에 나는 결혼이라는 문제를 약간 생각하게 되면서, 아버지 서가에서, 세계 사상전집 중의 하나인, 영국 목사 말서스(Malthus)의 '인구론'의 일본어 번역을 읽게 되었다. 그 내용은 한국처럼 작은 영국이 인구과잉으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에, 그 인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급박성을 다룬 것이었다. 피임(避妊) 기술이 없던 시대여서 인구가 자연적으로 25년 내지 30년 간에 배로 증가된다는 것이었다. 방치하는 경우 조만간 영국 백성이 바다에 다 빠질 지경이 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인구출산 조절을 해야만 하는데, 그 방법으로 그가 제창한 것은, 부부가 결혼을 하고 자식을 둘 만 나으면, 인구는 늘지 않는 다는 것이다. 피임 방법이나 도구가 전혀 없는 그 시대에, 무슨 방법으로 부부가 자식을 둘만 낳을 수 있는가 말이다. 말서스 목사는 방법이 두가지 밖에 없다고 하면서, 첫째는 결혼을 늦게 하는 것과, 둘째는 자제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30세 이후에 결혼하는 것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나서, 나도 30세 후에 결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한국이라는 나라도 영국과 대동소이한 소국이기 때문이었다. 그 후부터 나는 이광수의 '이차돈의 죽음'에서 말하는 것처럼 여자를 돌부처로 여기기로 하였었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은 천정배필을 만나는 일이어서,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이 나타날 때 나 자신의 계획이나 결심이 쉽게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서울 충무로에 있는 김치복 장로의 적산 가옥에 많은 피난민이 세를 들어 살고 있었는데, 나도 이석금이라는 영락교회 여집사 댁에 하숙을 하고 있었다. <계속>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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