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미국 대학생들의 모임

김용복 박사 영입과 그 후유증
신학교 전담 형사를 통해서 암암리에 나에게 침을 놓으며, 김 박사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것은 국가 차원에서 지시한 일인데, 나는 그들의 잘못된 인식과 행동에 동의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자 정보 당국은 내 주변의 어른들을 시켜서 간접적으로 김 박사 퇴출을 종용하는 것이었다. 국내에서 크게 사업을 하는 인사들은 정보부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는 시대인데, 영락교회 최창근 장로가 나에게 전화를 걸어 김 박사를 내 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식으로 충고를 하는 것이었다.
“장로님, 해방신학이 어째서 나쁩니까? 기독교가 해방의 종교가 아닙니까?” 하고 그의 말을 막아냈다. 정보부는 그런 수단도 먹혀들지 않는 것을 알고, 이제는 장신대 이사들을 통해서 노골적으로 압력을 넣는 것이었다. 이사장으로 있던 장선옥 목사를 통해서 누차 나에게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압력에 굴하지 않았다.
이제 일 년만 있으면 나의 학장임기가 끝난다. 63세로 임기가 끝나게 되는데 후임자를 물색하고 있는 중이었다. 교수회와 학생들은 나의 65세 정년까지 2년을 더 연장해서 집무하기를 바라서 결정을 하고 이사회에 지언을 한 상태였었다. 이사회는 그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즉 나더러 남은 2년을 학장 자리에 눌러 있으려거든 김 박사를 내 보내라는 것이었다. 이런 교환조건을 걸고 흥정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언제 학장을 하겠다고 했습니까? 당신들이 하라고 해서 한 것뿐인데, 이사회가 싫다면 내가 물러나면 그만이지, 내가 데려온 사람을 잘못도 없는데, 물리칠 수는 없습니다.” 하고 이사회 의견을 단호히 물리쳤다. 그러자 서울 영락교회에서 개최된 총회 기간 동안에도 이사회가 결정을 못 내리고, 나의 번의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마지막까지 내가 마음을 굽히지 않자, 이사회는 나의 임기를 4년으로 마감하기로 결정하고 총회에 보고하였다. 따라서 내 임기는 4년 한 텀으로 끝나게 되었다.
이사회는 후임 학장을 통해서 김박사를 쫓아내려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1987년 5월에 학장직에서 물러나고, 일년 간의 안식년을 얻어, 미국 죠지아주 Decatur 에 있는 콜럼비아 신학교에 교환교수로 떠나기로 했다. 후임 물색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는 중 이종성 박사를 다시 모시자는 안이 나왔고, 이사회가 그 안을 채택했다. 학장 이(離) 취임(就任)식을 할 때, Princeton 신학교 학장 길레스피(Thomas Gillespie) 박사까지 모셔왔는데, 학생들은 이종성 박사 취임을 극렬히 반대하는 데모를 하면서, 이(離) 취임식(就任式)장을 수라장으로 만들어 버렸다. 결국 9월 총회에서 이종성 학장 인준 청원이 부결됨으로 이 박사는 뜻을 이루지 못했고, 이사회는 다른 학장을 물색하는 진통을 겪게 되었다.
김용복 박사와의 관계
1967년에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하게 되는 학급에 강청자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예쁘장하고 전자(電子) 올갠도 탈 줄 아는 여학생으로 신학교 경건회 시간에는 올갠 반주도 하는 학생이었다. 그는 정능장로교회(용희창 목사 교회)에 출석을 했고, 같은 교회에서 봉사하는 연세대학교 철학과에 재학 중인 김용복이라는 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김용복이 미국 Princeton 신학교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강청자는 짝 잃은 기러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용복과 편지 연락을 하면서, 언젠가는 자기도 애인을 따라 미국으로 갈 것을 희망하면서 공부하고 있었다.
그런데 김용복으로부터 오는 편지가 점점 그 빈도가 줄어가자, 강청자는 조바심이 생겨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빨리 초청장을 보내 달라고 졸랐다. 요행히 초청장을 보내 왔기 때문에 여행 수속을 하여 한국을 떠나게 되었다. 나는 매우 다행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나도 두번 째 유학을 Princeton 신학교로 가려고 수속 중이었기 때문에 거기서 만나자는 약속도 했었다. 그런데 내가 Princeton에 도착해 보니 강청자는 그 곳을 떠났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의 애인 김용복이 다른 여자, 미국 처녀를 사랑하고 있었고, 강청자는 실연을 당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피츠버그로 가서 피츠버그 대학 신학부에서 유학중인 김형태 박사의 보호를 받으면서 있다가 낙심 중에 한국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속리산에 관광을 갔다 돌아오는 길에 뻐스가 절벽에서 굴러 떨어지는 통에, 목숨을 잃었다.
나는 프린스톤에서, 거기에 있는 다른 한국 유학생들로부터 강청자의 소식을 듣고, 김용복에 대하여 좋지 않은 인상과 인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나는 남자 기숙사 Brown Hall 4 층 방에 있었고, 김용복은 나의 방 바로 맞은 편 방에 있었다. 어떤 주일에 나는 무심코 김용복의 방에 들어갔다. 그런데 거기에 젊은 미국 여학생 하나가 맨발로 서 있는 것이었다.
김용복은 천연스럽게 그녀를 나에게 소개하며, 자기가 뉴욕 어느 교회에서 청년들을 지도 하는데, 그가 지도하는 여학생 중의 하나인 매리온(Marion)이라는 것이었다. 옛날에는 여학생들은 여자 기숙사에 있었고, 남자 기숙사에 출입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 여학생이 자기 기숙사에서 혹은 게스트 하우스에서 자고, 용무가 있어서 김욕복을 방문하러 온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 여학생의 맨발이 의심쩍었었다. 다음 주일에 어쩌다가 내가 다시 김용복의 방에 들어갔는데, 같은 여학생이 다시 그 모양으로 거기에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둘의 관계가 연인관계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12년 만에 다시 보는 미국 사회가 그만큼 변했구나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남녀 기숙사가 개방되고, 남자 기숙사에 여자들이 드나들고, 학교 식당에서는 콤보 뺀드 음악에 맞추어 땐스를 하고, 교내 곳곳 자판기에는 맥주와 담배가 팔리고 있었다. 존 맥카이 학장 때, 즉 나의 첫 번 유학 때에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일들이 신학교 안에서 행해지고 있었다. 월남 전쟁과 푸에르토리코 사람들이 대거 미국에 이민 오는 등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미국은 급속도로 세속화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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