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988년 12월 15일에 시카고에 도착, 맥코믹 신학교 교수 사택에 입주하고, 미국 이민생활을 시작했다. 장신대에서 받은 퇴직금은 못난 두 아들 명진이와 호진이의 부채를 갚아 주느라 한 푼도 남지 않았다. 빈손으로 이민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의 여생에서나마 그들의 성화를 받지 않기 위해서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강형길 교수는 맥코믹 신학교 부교장 밥 월리(Bob Worley)와 좋은 콤비를 이루어, 시카고 지방은 물론 모든 지역의 한인들에게 M. Div. 학위과정을 열고 교육하는 일을 시작하였고, 그 일에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초청한 것이었다. 1989년 봄 학기부터 강의를 하며 지내는 동안, 우선 미국 영주권을 얻어야 하기 때문에 변호사를 통하여 수속을 시작하였다.
신학교에서 받는 시간 강사 수당만 가지고는 생활이 어렵기 때문에 교포교회 담임 자리를 구하는 중 PCUSA 중부 지방 책임자로 있는 현순호 목사가 인디아나주 West Lafayette에 있는 퍼듀(Purdue) 한인교회를 소개해 주었다. 퍼듀 대학교에서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을 중심한 교회였다. 그 도시로 이사하여 전세 집에서 살면서 그 교회를 돌보고, 약 3일은 시카고에 올라가 맥코믹신학교에서 강의를 하곤 했다. 시카고에는 미국 장로교회에 가입하지 않은 한인 장로교 총회가 경영하는 신학교 분교가 있었고, 거기에서도 가르쳐야만 했다.
몇 달 후에, 셋째 선진이가 Princeton에 있는 Westminster Choir College에서 열린 성가대 지휘자 세미나에 왔다가 나의 시카고 사택에 나타났다. 그 때 Princeton 신학교에 여름 연수를 왔던 김종춘 목사도 선진이와 같이 온 것이다. 아니 나와 내 아내가 Princeton까지 가서 그들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그들과 함께 맥코믹 신학교 사택에 왔는데, 강형길 교수가 나타나더니 선진이를 신학교에 입학시키자고 권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는가고 물었더니, 그렇게 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것이었다.
영어를 잘 모르는 선진이, 신학교 공부를 별로 생각해 보지 않은 아이가 어떻게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의아해 했지만, 그러자고 하면서 그의 입학을 서둘렀다. 실은 선진이가 결혼을 하고 장신대 교회음악과를 졸업한 다음, 생계가 막막하여 염려스러운 형편이었다. 그런데 선진이가 당장에 맥코믹 신학교 학생이 되어, 다른 많은 한인들과 함께 신학공부를 하는 것을 보니, 하나님께 감사할 수밖에 없었다. 나의 인도네시아 선교사 생활 3년 때문에 선진이는 많은 불이익과 희생을 당한 셈인데, 이렇게 뜻하지 않은 기회에 맥코믹신학교 정식 학생이 되는 은총을 받았으니 말이다. 하나님의 축복이 아닐 수 없다. 그런대로 선진이는 신학교 3년을 무난히 마칠 수 있었다.
나는 퍼듀교회와 맥코믹 교수 생활을 3년 동안 한 후에, 아무래도 중단됐던 성경교재 집필을 계속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렇게 할만한 기회와 조건을 찾아보았다. 즉 시간적 여유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우선 Princeton 신학교에 연구자금을 신청해보았다.
이종성 학장이 2년간 그 기금을 얻어서 집필활동을 한 것처럼, 나도 길이 있지 않을까 해서 신청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답은 No 였다. 한국 장로교회 장년부 성경교재 집필은 한국 장로교 총회가 책임질 일이라고 하며, 자기들은 연구비 지급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강형길 교수는 맥코믹 신학교에서 정식 교수로 가르치는 길도 제시했고, North Park College 교수 자리를 알선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것은 나의 시간을 더 많이 빼앗는 자리들이기 때문에 응락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LA에 있는 장로회신학교 교장 박희민 목사로부터 그 학교에 신설하는 대학원을 책임져 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래서 나는 시간이 많이 필요한 사람인데, 그 자리는 너무 바쁜 자리가 아니냐고 했더니, 얼마든지 시간을 낼 수 있다고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1992년 초에 LA로 이사를 가서 그 신학교 대학원장 책임을 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웬걸, 그 학교에는 교수가 없어서 닥치는 대로 다 가르쳐야 하는 형편이었다. 도저히 시간 여유를 가질 수가 없었다. LA에 있는 동안 PCUSA 한국부에서 나더러 신앙고백서(The Book of Confession)를 한글로 번역해 달라는 부탁을 받고 그 일을 해냈고, 그런대로 보람 있는 날들을 보냈다. 그러나 내가 참으로 해야 할 숙제는 할 수가 없었다.
한국성경연구원 성경연구 완간 및 신약성서 출판 감사예식에서의 박창환 목사
성경연구지 발간
그러다가 1994년 봄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38선이 곧 열릴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한국으로 나가 그 날을 기다리다가 누구보다도 먼저 고향에 가자는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때 마침 한국에서 전주 한일신학대학 학장직을 맡은 김용복 박사의 전화를 받았다. 한국에 나와서 같이 일하는 것이 어떻냐는 것이었다. 아귀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서, 서울행을 결심했다. 1994년 9월에 한국으로 나갔다. 우선 한일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일로 시작하고, 구체적으로 할 일을 모색했다.
그 때 나로서 한국교회에 공헌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를 궁리 중에, 한국성경연구원을 조직하기로 했다. 그것은 한국 목사들의 설교에 약점이 있다고 보였기 때문이었다. 한국 목사들은 무조건 대형교회를 이루려는 생각으로 동분서주하면서 성경을 연구할 시간이나 기도할 시간조차 없어서 마구 아무 성경구절이나 읽고서 생각나는 대로 주관적인 이야기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부터라도 신학교에서 성경연구방법론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목사들이 성경의 참 뜻을 알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의 뜻을 몰라서 마구 설교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되었다.
그러니 바쁜 사람들더러 바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몰라서 못 하는 사람에게 알라고 해도 소용이 없으니, 나로서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을 열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래서 한국성경연구원을 조직하여 성경학자들을 동원하여 설교 본문들의 참 뜻을 밝혀 그것을 잡지에 실어서 설교자들에게 배부하자는 목적을 세운 것이다.
때마침 박석규 목사가 어떤 특지가에게서 얻은 돈으로 서울 중계동에 큰 공간을 얻었다고 하며, 거기서 한국성경연구원 사업을 하도록 허락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유지들의 도움으로 중계동에 전세방을 얻어 입주하고 성경연구원 작업을 시작했다. 장신대에서 같이 일하던 한준식 장로를 사무장으로 앉히고, 장신대 졸업생 안용성, 박명우를 간사로 하고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박석규 목사는 그 사업에서 어떤 경제적 이득이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시작했던 것 같다. 오히려 그 사업이 자신에게 부담이 되자 그 일에서 손을 떼려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서울시 남쪽 양재동으로 사무실을 옮기고, 나도 분당으로 전세를 얻어 이사를 갔다. 양재동에서는 얼마 후 박명우가 영국으로 유학을 갔고 대신 김재봉 군이 간사 일에 가담했다. <계속>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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