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목사님의 교회 배경을 말씀해주세요.
저희 교회는 플로리다주 잭슨빌에 소재한 잭슨빌제일침례교회입니다. 저는 1990년부터 28년째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습니다. 교회 사역의 목표는 '사람을 키우는 교회'로 사역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한국어, 영어, 버어마 사역을 하고 있으며 난민들을 돕기 위해 주정부의 허가를 받아서 고등학교와 대학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94년부터 중앙아시아에 재활원을 세우고 장애자들에게 의족을 만들어 제공해주는 사역을 시작했는데, 1997년에는 북한 어린이들을 위한 빵공장을 세워 빵을 공급하다가 지금은 북한의 장애자연맹과 협력 장애자들에게 의족을 제공해주어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국제 뉴호프재활재단은 어떤 기관이며 시작하게 된 동기를 말씀해주세요.
1990년대 초에 어느 신문사 주최로 목회자들을 위한 성령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 세미나에 참석하여 홍대욱 원장님을 만난 것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분은 제주도에서 출생하여 1953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시내에 나가다가 자동차 사고로 다리의 무릎 아래를 잃은 분입니다.


이분이 저에게 본인이 살아온 이야기를 해 주었습니다. 교통사고를 당하고 병원에서 수술을 한 후에 크러치를 하고 퇴원을 하여 집으로 왔는데 아버지가 돈을 주면서 이 돈을 가지고, 집을 나가서 네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라고 하셨답니다. 집을 나가서 학교를 다니던지, 아니면 사업을 하던지, 기술을 배우던지, 네 자신의 삶을 개척하라고 하시면서 만일 장애자라는 이유로 부모를 의지하고 형제들을 의지하면 너는 사람구실을 못하게 되니까 그러지 않기 위해서는 집을 나가서 네 자신의 삶을 개척하라고 하셨답니다.

그때는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버지의 손에 끌려서 제주도 부둣가에 와서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타고 고향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하여 아버지가 큰 도시에 가서 자리를 잡으라는 아버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경부선을 타고 서울로 가게 되었습니다. 밤늦은 시간이 되어서 기차가 서울역에 도착했는데 그때 당시는 1953년도 전쟁 직후라 서울역 광장과 거리들이 불이 없어 어두컴컴한 저녁 늦은 시간에 도착하여서 어디가 어딘지 분별도 못한데다가 갈 때가 없어서 서울역 광장 앞에서 서성거리며 역전앞을 떠나지 못하고 있었답니다.

그때 어느 미국분이 가까이 다가와서 이야기를 걸어 왔습니다. 그 사람은 어째서 다리를 잃었느냐, 왜 이 늦은 시간에 여기에 있느냐, 전쟁에 참여했느냐? 등등을 물었습니다. 그래서 원장님은 교통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건 이야기와 나는 제주도 시골에서 와서 갈 곳이 없다고 이야기 했더니 미국분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기는 당신 같은 사람에게 의족을 만들어 주기 위해서 미국에서 온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면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의 안내를 받아 숙소에 가서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곳은 서울역 앞에 있던 장애자들을 돕는 세브란스병원 재활원이었습니다.

아침에 미국 분이 나타나서 다리의 절단 부위를 살피고, 의족을 만들기 위해서 캐스트를 한 후에, 의족이 완성될 때까지 숙소에 가 있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숙소에 몇일을 머물면서 의족 만들어지기를 기다리는 중에 아침에 화장실을 갔는데, 지저분해서 도저히 사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물동이와 빗자루를 빌려서 매일 아침, 저녁으로 화장실 청소를 했습니다. 화장실이 깨끗해지니까 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사이에, 누가 청소했느냐고 이야기를 하다가 재활원에 와있는 홍대욱이라는 청년이 청소를 한다는 소문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 소식이 미국 분에까지 전달이 되자 미국분이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을 도왔지만, 칭찬 듣는 사람이 없었는데, 이 청년이 칭찬 듣는 것을 보고, 그분이 제안을 하였습니다. “만일 청년이 원하면 내가 당신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겠다. 그리고 저녁에 학교에 다니도록 돕겠다”하고 제안 하였습니다. 그 제안은 바로 고향을 떠날 때 아버지가 부탁한 말씀들이었습니다, 공부를 하던지, 기술을 배우던지, 네 자신의 삶을 개척하라는…, 그래서 그 의견을 받아들이고 미국분 밑에서 비서 노릇을 하면서 기술을 배우고 저녁에는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여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까지 하여 미국에 와서 살게된 이야기를 간증 하였습니다. 저는 그분의 간증을 들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삶의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은혜가 되었습니다. 이분은 어려운 시절에 사람을 잘 만나서, 그분 도움으로 예수님을 영접하고, 기술까지 배우고, 대학을 졸업후, 결혼을 하여 미국에 와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녀를 믿음으로 키운 간증이였습니다. 저는 너무 은혜가 되어서 교회에 돌아와 교인들에게 그 분의 삶을 소개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교우 중 세분의 성도가 헌금을 해주었습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서 장애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사역 고충이라면?
북한에서 장애자들을 효율적으로 돕기 위해 재활원을 운영하고 있는데 재활원에는 의족을 만드는 기술자를 비롯하여 여러명의 직원들이 함께 일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에게는 재활원에서 일하는 것이 생업이기에 매월 생활비가 나가야 하지요. 또 한다리 잃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는 의족부품이 있어야 합니다. 어느 때는 환자가 의족이 필요하여 찾아왔는데, 재정이 어려워 의족을 만들어 주지 못하고, 돌려보낼 때에는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사역하는 직원들에게 수고한 만큼 생활비를 주지 못할 때 직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하고요. 장애인 사역에 뜻이 있는 분들이 협력해주시면 더욱 많은 장애자들에게 의족을 만들어 줄 수 있습니다. 장애인들이 희망과 용기를 가지고 사회에 복귀하여, 적응하며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사역의 보람을 느낄때는?
전쟁이나 혹은 순간의 사고로 다리를 잃게 되면 절망이 대단합니다. 그러나 재활원에 와서 의족을 착용하고 걷는 모습을 보면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엄청나게 큰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작은 돈을 가지고 절망한 사람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사역이라 보람이 아주 큽니다.

사역을 통해 복음도 전하고 계신데요.
장애자 사역은 관계중심 사역입니다. 환자 한 명을 도우면 그 주위에는 여러 사람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가까이는 부모님, 형제, 친척, 동네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의족을 해주면 일년에 한 두번은 수리를 하기위해 재활원을 찾게 됩니다. 이렇게 지속적인 관계를 가지고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으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장점이 있습니다.


현재 사역을 돕는 협력자들이 계신가요?
가까이서 저를 알고 이해하시는 목사님과 교회, 그리고 저희 가족들이 후원해주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궁극적인 비젼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전쟁이나 예기치 못한 순간의 사고로 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리를 잃은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 헤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만일 가정을 가지고 있는 남편이 순간의 사고로 다리를 잃었다면, 본인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들의 상실감은 대단히 큽니다. 절망한 그들에게 의족을 제공해주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의족을 사용하면 걷는데 지장이 없습니다. 환자 본인이 재활을 잘하면 일상생활에 복귀하여 생활하는데 어려움이 없습니다. 장애인들도 사회에 복귀하여 선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북한과 중앙아시아를 돕고 있지만 여력이 주어지면 전 세계 어려운 나라에 사는 절단자 장애자들에게 의족을 제공하여, 그들이 사회에 돌아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목사님의 자녀에 대하여 말씀해주세요.
아내 이현희 사모와 1남1녀가 있습니다. 큰 딸은 남침례교회 WMU(전국여전도협회, 본지 A9 필자)에서 선교교육교재를 편집하고 있습니다. 아들은 다민족교회 목회를 하고 있으며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사님의 사역이 북한을 넘어 더욱 확대되어 나가시길 기도합니다.

현재 북한 장애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나무로 만든 의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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