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는 전혀 신식 교육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지만, 늘 '활천'(活泉)이라든가 '농민생활' 등 잡지를 구독하셨다.

II. 기억에 남은 나의 생애의 편모(片貌)들

내가 살던 고향은

내가 태어난 지 약 일 년 뒤에 내 할머니가 막동이 경대(敬大)를 출산했다. 바로 그 날 내 어머니는 시어머니 출산 때문에 집에서 시중을 들고 있었고, 경선 고모님이 할 살배기 나를 데리고 마을을 갔었단다. 그 집에서 놀던 나는 뒤뚱뒤뚱 걸음마를 하다가 넘어지면서 파리통에 내 얼굴을 박아 왼쪽 눈 아래가 크게 찢어졌다. 파리통이라는 것은 유리로 만든 물그릇으로, 농가에 파리가 많기 때문에 파리를 잡기 위해서 고안된 도구이었다. 예리한 유리 그릇에 얼굴을 박았으니 찢어질 밖에 없었다. 시골인지라 의사도 약방도 없고, 집에서는 할머니가 해산을 한다고 법석이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나의 안면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않고 그냥 아물게 했기 때문에, 나는 그 흉터를 나의 생애 마지막까지 지니고 왔다. 경대 삼촌과의 나의 이상한 인연의 한 조각이다.

맏아들인 내 아버지는 그 당시로서는 드문 예로서, 멀리 평양까지 나가 공부를 하고 대학교까지 다니는 행운아였다. 아무리 어려워도 맏아들만은 공부를 시켜야하겠다는 할아버지의 결심의 소치였다. 숭실대학 제7회, 숭실전문학교 제1회 수석 졸업생으로 졸업하신 아버지는 일본 제국의 압제 하에 있는 조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교육이 급선무라는 생각을 가지시고, 신천(信川)에 있는 교회 부속 경신(敬信)학교 교사로 취임하셨다. 숭실 대학 때 교제가 있던 미국 선교사들은 아버지더러 목사 공부를 하라고 권했던 모양인데, 아버지는 교육에 더 마음을 두셨던 것이다. 나는 여섯 살이 지날 때까지 아버지 얼굴을 본 기억이 없다. 집안에 식구들이 많고, 삼촌들과 너무도 재미있게 놀고 지내노라고, 잠간 씩 다녀가셨을 아버지를 주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소꼬지에서의 나의 유아기의 생활은 참으로 기쁘고 평화롭고 재미있는 것이었다. 싸움이나 더러움이나 구질구질한 광경을 보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나의 유년기는 나의 생애에 참으로 좋은 주추가 되었다고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한다. 그런 환경을 누구나 가지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나는 특히 나의 할아버지의 모험심과 개척정신을 보면서 자랐다. 할아버지는 전혀 신식 교육을 받지 않으신 분이시지만, 늘 '활천'(活泉)이라든가 '농민생활' 등 잡지를 구독하시며 세상 물정을 아시고, 새것을 시험하시고 도전하시면서, 무엇이든지 한 번은 해 보시는 분이셨다. 상당히 많은 논 밭 농사를 하시면서도 과수원을 사서 온갖 종류의 사과나무를 재배하셨고, 양돈, 양토, 양봉을 경험하셨다. 사탕 무, 사탕수수 재배, 약초 재배, 삼베와 목면 만들기, 양잠, 그리고 정미소 경영 등 허다한 것을 해 보시는 분이셨다. 그 당시 시골 사람들이 꿈도 꾸지 못하는 때에 할아버지는 전기 시설을 하고 큰 건전지를 놓고 전깃불을 사용하시기까지 하셨다. 그러면서 교회 일이라면 앞을 다투어 헌신하고, 모든 필요한 것을 바치시는 분이셨다. 내가 알기로도 교회당을 세 번 이상 개축 또는 신축하는데, 그 일에도 앞장서셨다. 한 번은 교회당 지붕이 새서, 지붕을 새로 해야 할 형편이 되었을 때, 할아버지는 한 필 밖에 없는, 농번기의 필수품, 농우를 팔려고 우시장으로 끌고 나가셨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는 한국교회 설교 예화집에도 올라있다. 그는 그의 장손인 나를 끝까지 경제적으로 밀어주시노라고 애를 쓰셨다. 내가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에서 공부할 때, 그리고 일본 동경으로 유학을 갔을 때도 모든 비용을 아끼지 않고 대주신 분이시다. <게속>


박창환목사 (전 장신대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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