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북한의 사리원시 모습

내가 살던 고향은

소꼬지에는 동민을 위한 야학(夜學)이 있었고, 나도 4살 때부터 야학에 다니며, 한글도 익히고 산수도 배웠다. 여섯 살이 되었을 때, 나보다 두 살 위이신 경민 삼촌을 따라 약 십리 거리에 있는 기양(岐陽)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섯 살 백이가 십리 길을 갔다 온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어렸을 때 그리 튼튼하지를 않았었다. 하학 길에는 다리가 아파서 길에 주저앉기도 했고, 경민 삼촌에게 엎혀서 오기도 했다.


큰 할아버지 박태로(朴泰魯)는 우리 박씨 집안에서 제일 먼저 예수를 믿은 모양이다. 그의 영향으로 동생들도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이다. 일설에는 박태로 할아버지가 신천지방의 개망나니 폭력배 김익두(金益斗)를 전도했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는 일찍 예수를 믿고 재령읍 동부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전도사 일을 보셨다. 그는 평양신학교 제5회 졸업생으로, 1913년에 한국장로교 총회 파견으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가 되어 떠나셨다. 한국교회가 중국으로 보낸 제1호 선교사였다. 그러나 그는 병을 얻어 선교사 생활을 오래 하지는 못하시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투병하시다가 별세하셨다. 그의 맏딸 경애(京愛)는 출가하여 원산에서 살았고, 세균(世均)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독자 경희(京羲)는 사리원 서부교회 앞에서 홀로되신 어머니를 모시고 살며, 사리원 지방의 Boy Scout 운동 지도자였다.


나의 작은 할아버지 박태선(朴泰善)은 사리원 근처 모동(暮洞)이라는 곳에서 농사를 짓고 사셨고, 모동교회 장로이셨다. 맏아들 경찬은 왜정 말기에, 그 당시 일본 영토였던 가라후도(樺太)에 노무자로 징용되어 가셔서 행방불명이 되었고, 후처에게서 난 경완, 경원 두 딸과, 경진, 경엽 두 아들이 있었다. 경원 고모만이 38선을 넘어와 이남에서 살았다.


사리원에서

신천 경신학교 교사로 계시던 아버지가 사리원 덕성보통학교 교장이 되어 사리원으로 전근하셨다. 그 때부터 아버지는 사리원 서부 교회 근처에 있는 김국진 과부 할머니댁 한칸을 얻어 분가를 하셨다. 그 때 비로소 나는 도시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아버지의 사상이 불온하다고 해서(3·1 만세운동에 가담했다고 해서) 덕성보통학교 교장 직 인가를 취소하였기 때문에, 일 년 후에는 무직자가 되어버렸다. 그 자리에 신상빈이라는 교장이 부임했다. 그 무렵 사리원 근방(재령평야)에는 일본인들이 수리조합을 만들어 우리 농민들을 착취하고 한국인의 전토를 점유하려는 마수를 뻗고 있었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지둔(於之屯)수리조합반대사무소'라는 것을 차리고 투쟁을 하며, 일본 총독부와 대항하는 일을 하셨다. 그러면서 이따금 사경회를 인도하러 가시는 것도 내 눈에 띠었다. 확성기가 없는 시대여서, 한 주간 사경회를 인도하고 오시면 목이 꽉 쉬어 말씀을 하시지 못 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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