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기억에 남은 나의 생애의 편모(片貌)들

진남포 득신학교 그리고 오산(五山) 고등보통학교①

내가 11 살 때이다. 아버지가 진남포 득신학교 교장으로 초빙되어 그리로 이사를 갔다. 비석리교회(허덕화 목사 담임)가 경영하는 미션스쿨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평양 숭실학교 동급생이었던 강양욱 선생이 교사로 있는 학교였다. 아마도 강 선생이 자기 친구인 아버지를 소개했던 것 같다. 교정 안에 있는 학교 사택에서 살게 됐다. 아버지는 교장, 강양욱 선생은 나의 6학년 담임선생이 됐다. 진남포는 항구도시라서 부두에 나가면 큰 기선도 보고 바다구경도 할 수 있었다.

유명한 길선주 목사의 부흥회가 억량리 교회(김성택 담임목사. 안창호 선생의 매부이고 장로교총회 총회장을 지내신 분)에서 열렸다. 나는 열두 살 나이에, 요한계시록을 강해하며 부흥집회를 하는 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소위 중생의 체험을 가졌다. 김성택 목사님의 딸 김순옥이가 나와 동급생이었다. 일 년 후에 졸업을 하고 평양고등보통학교와 숭인 상업학교에 입학지원을 하고 입학시험을 치렀다. 그러나 두 곳 다 낙방을 하였다. 득신학교는 사립학교요, 항일정신을 가지고 가르치는 학교여서 일본말 교육이 시원치 않았었다. 따라서 일본말(소위 국어) 시험에 낙제 점수를 맞은 것 같다. 나는 재수를 하면서 6학년을 다시 다녀야만 했다. 강양욱 선생은 목사가 되겠다고 평양신학교에 입학하고 학교를 떠났다. 아버지가 6학년 담임선생이 되어 가르치셨다. 나는 산수가 재미있었고, 따라서 성적이 좋았다. 이번에도 평양고보와 숭인상업학교에 시험을 쳤지만 또 낙방을 하고, 평안북도 정주군에 있는 오산고등보통학교에, 다른 여덟 명 동급생과 함께 입시를 보러갔다. 그러나 나 혼자 합격하고 다른 아이들은 다 낙제하였다.

나는 이렇게 만 열두 살부터 집을 떠나 학창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나의 중학입학과 함께 득신학교 교장직을 버리고, 평양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시작하였다. 목사가 되기 위해서였다.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이목리(利木里)에 있는 이천(利川) 장로교회가 있는데, 아버지는 그 교회 담임전도사 일을 보면서, 약 30리 거리에 있는 평양신학교를 자전거로 통학하셨다. 이천이라는 동네는 양쪽으로 대동강을 끼고 있는 모래땅이어서 땅콩과 옥수수와 올감자를 많이 재배하는 곳이었다. 교회에는 부속 소학교가 있었고, 김재은 장로가 교장이었다. 김 장로의 동생 재경은 숭인(崇仁)상업학교 학생이었고, 방학에는 만나서 같이 놀았다. 김재경은 6.25 전쟁 1.4 후퇴 때에 조카 하나를 데리고 남하하여, 장로회 신학을 졸업하고, 서울서 재혼한 부인과 그 조카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고, 다시 캐나다로 가서 시민권을 얻고 토론토 영락교회를 담임하였다. 이름을 김재광으로 고쳤다. 그는 러시아가 개방된 후에는 러시아 선교에 헌신하였다.

나는 오산학교에 입학하자 엄진승 집사의 집에서 하숙을 하고 살았다(고대 교수 엄영식의 부친 집). 오산학교는 이승훈 장로가 기독교정신을 가지고 애국 인재를 기르기 위해서 세운 학교였다. 기숙사가 없고 학생 전체가 여러 하숙집에 분산되어 사는 것이었다. 선생님들이 밤마다 하숙집을 순회하면서 감시하고 교도(敎導)하였다. 나는 일학년 때 방용원이라는 5 학년 학생과 한 방에서 지냈다. 그는 이미 결혼한 아기 아버지였다. 한 학급이 120 명이고, 그것을 갑(甲)반과 을(乙)반으로 나누어, 한 반에 60명이 공부를 했다. 임용연(任用璉)이라는 화가 선생님이 담임선생이었다. 나는 일학년 때 다른 데 정신을 팔지 않고 공부에만 열을 올렸다. 첫 여름 방학 때 성적표를 들고 이천 집에 가서 아버지께 성적표를 내 보였더니 만족해 하셨다. 일등은 아니었지만 4등을 한 나를 칭찬해주셨다. <계속>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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