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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하나님의 넘치는 축복 속에 걸어온 나의 삶

II. 기억에 남은 나의 생애의 편모(片貌)들

박창환목사 | 등록일 2018년10월05일 19시44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 현재의 구니다찌 음악학교

 

II. 기억에 남은 나의 생애의 편모(片貌)들

 

진남포 득신학교 그리고 오산(五山)고등보통학교

그러나 어머니가 다시 편지를 보내시며, “얘야, 목사 일을 사람의 힘으로 하는 줄 아느냐?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되는 것인데, 네가 못한다고 하면 되느냐?”고 책망조로 회답을 주셨다. 그때부터 나는 생각을 고쳐먹고, 목사가 될 준비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어떤 목사가 될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오산장로교회 담임목사 박기환(朴基煥)은 숭실전문학교와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신 신령한 목사였고, 설교도 훌륭하게 하시는 목사였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는 그가 음치(音癡)라는 사실이어서, 찬송가를 선창하지 못하시는 것이 흠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그점에서 그를 도와드리기도 했다. 즉 찬송가 몇 장을 부릅시다고 하면 우리가 먼저 소리를 내주고 큰소리로 불러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 목사가 되면 박 목사님처럼 어떤 시골 구석에라도 가서 목회를 하게 될 터이니까, 목사는 팔방미인이 되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적어도 음악을 아는 목사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졸업을 하면 일본 동경으로 음악공부를 하러 가기로 계획을 짰다.


오산학교 브라스밴드 멤버로서 평양 방송국에 방송을 하러 갔던 일도 있고, 선천 신성중학교 음악부와 연합 음악회를 하러 선천에 가서 연주한 일도 있다. 황기오(黃基伍)는 황봉찬 목사의 아들로서, 오산고보 나의 2년 후배이고, 동경 도야마(戶山)군악학교에서 클라리넷을 전공하여 일본 천황 앞에서 독주를 할 정도로 빼어난 음악가였다. 해방 후에 경희대학교 총무처장직을 맡았다가 브라질 이민을 가서 거기서 작고했다.


황기오의 클라리넷과 나의 트럼펫으로 듀엣 연주를 한 일도 있다. 졸업기념 음악회 때에는 내가 피아노 독주를 하는 순서도 있었다. 이석화 선생댁에서 살면서 그에게 작곡도 배우고 바이올린도 배웠다. 동경제국음악학교 작곡과를 지망하였던 것이다. 졸업식에는 먼 황해도 시골에서 할아버지가 바쁜 농촌 일손을 멈추시고 맏손자의 졸업식을 참관하러 오셨다. 몇 사람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성적 우등상장과 부상을 받는 손자를 보시고 흐뭇했을 것이다. 다음은 5개년 개근상장과 부상을 받는 건강한 손자를 보시며 또한 기뻐하셨을 것이다. 이제 나 혼자만 받는 상이 있었다. 봉사상이라는 것인데, 지난 3년 동안 언덕에 올라가 하숙집들이 있는 방향으로 나팔을 불어 기상, 취침, 그리고 저녁 공부시간을 알리는 일을 내가 도맡아 했기 때문이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매일 높은 언덕에 시간을 맞추어 올라가서 신호나팔을 불어주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 덕택에 내 몸이 건강해졌고,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전체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 것이다. 그 봉사에 대한 상을 학교가 마련한 것이다. 사실 영어 사전을 살 돈이 없어서, 남이 쓰던 헌 책을 가지고 5년을 버텼었는데, 봉사상이라고 해서 삼성당 콘사이스 영어사전을 상으로 주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상을 하나 더 받는 손자를 보시며 더욱 기뻤을 것이다.


짧은 동경유학

1942년 봄에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나는 부모님이 계시는 장연(長淵)읍에서 조주현 장로의 양복점에서 생전 처음, 신사복 두 벌을 해 입고 일본 동경으로 음악을 공부하러 떠났다. 먼저 구니다찌(國立) 음악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쳤다. 피아노 실력이 모자라 낙방하였다. 그래서 다음으로 시부야 구 세다가야에 있는 제국음악학교에서 입학시험을 쳐서 합격을 했다. 작곡과를 지망한 것이다. 예과 일학년에 들어갔는데, 졸업반에는 한국 학생들이 여러 명이 공부하고 있었다. 후에 한국에서 일류 음악가로 이름을 날린 인사들이었다. 나운영, 전봉초, 이상춘, 이동훈 등등이다. 교수진에는 스즈끼싱이찌(鈴木鎭一)라는 유명한 바이올린 선생, 즈가와(津川)라는 지휘가, 기무라(木村)라는 작곡과 교수 등이 있었다. 동경의 초봄은 습기 탓인지 매우 차고 을씨년스러웠다. 그런대로 동경 구경도 하고 새 문물을 접하는 재미도 있었다. 그때는 이미 소위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어, 미국이 일본을 반격하고 있는 때였다. 어느날 미국 폭격기들이 동경을 공습하였고, 며칠 후에는 한국인 갑자(甲子)생부터의 징병령이 포고되었다.


“아차, 이제는 일본군에 끌려가 일본을 위한 전쟁을 해야 하는구나. 불원에 죽어야 한다면, 공부는 해서 뭘하노. 집에 가서 부모님이나 봉양하다가 끌려가도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음악학교 예과 일학년 한학기도 끝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음악학교 냄새만 맡고 만 셈이다.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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