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치하 “굴하지 않는 교회가 무서웠다” 1919년 3·1운동 때 발표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명 중 기독교인은 16명이나 된다. 감리교측이 9명, 장로교가 7명이다.

그 사건은 소위 정방산(正方山) 비밀결사사건이라는 의옥(疑獄) 사건이다. 아버지가 주모자가 되어 황주군 일대의 목사들이 정방산에 모여서 반국가 음모를 꾸몄다는 허위 날조 의옥 사건이다. 나도 진실을 알지 못한다. 실직한 목사들 두 세 명이 무료하니까 정방산에 같이 소풍을 갔었는지 모르겠다. 일이 있었다면 고작 그런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헌병대는 그것을 확대하여 그 일대의 목사들을 몰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허위 사실을 진실로 만들기 위해서 갖은 고문을 다 가하였다. 고문에 시달리다 죽은 정 모 목사님도 계신다. 김성칠 목사는 머리가 터지고 머리카락이 다 빠졌다. 주모자로 지목된 아버지는 밤잠을 안 재우는 고문을 당하는 등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계셨다. 하루는 내가 차입을 위해서 헌병대에 나타났는데, 나를 유치장 복도에 감금하고 일주간을 지나게 하는 것이었다. 내 입에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자, 이 삼 개월 후에는 징집될 사람을 오래 가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조서를 꾸민 후 나를 석방하려고 취조실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었다. 죄목을 씌워서 내보내야 하기 때문에 나의 죄를 따지는 것이었다. 그 당시에는 일본어를 언제 어디서나 상용해야 한다는 것이 법으로 되어 있었다. 취조관 왈 “너는 집에서 국어(일본말)를 상용했느냐?”고 하는 것이었다. “아니요”하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 결국 일본어를 사용하지 않은 죄 값으로 한 주간 구류(拘留)한 것으로 하고 석방되었다.

이삼일 후이면 내가 경남 경화동 일본 수병(水兵) 훈련소로 징집되어 갈 참이기에 마지막으로 아버지 면회를 신청했다. 어쩌면 내가 전사하기 전의 마지막 면회일 수도 있었다. 일본 헌병 입회하에 아버지와 내가 대좌하였다. 아버지는 낭랑한 목소리로 나의 입대를 격려하며,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는 말씀을 하셨다. 즉, 당신은 아무 죄를 지은 것이 없으니 안심하라는 말씀이었다. 부자(父子)의 마지막 상봉 면회를 지켜보던 인본 헌병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일말의 감정은 가지고 있었는지, 피점령지 백성의 억울한 운명을 동정하여 눈물을 흘렸을까. 아니면 그저 부자의 불우한 작별을 가여워서였을까, 알 길이 없었다.

그 일이 있기 며칠 전이었다. 서흥 역에서 경의선 새벽 열차를 타고, 평양 시내 성화여자고등성경학교에 등교 겸, 오빠 김성칠 목사에게 차입 음식을 전하기 위해서 올라오는 김인실(仁實)이라는 여학생이 있었다. 같은 차로 나도 같은 목적으로 평양에 오르내리는 때였다. 하루는 그 여학생이 차 안에서 나에게 편지봉투 하나를 내 주는 것이었다. 그 때까지 수 십 일을 같은 차를 타고 다녔지만, 서로 말 한 마디 건넨 적이 없는 관계였다. 그 편지를 받아가지고 침촌(沈村) 역에서 내려, 나의 귀가를 기다리고 있는 어머니와 동생들이 있는 집에 이르렀다. 어머니와 함께 그 여학생의 편지를 열어보았다. 한 마디로 줄인다면 나와 당장에 결혼하자는 청혼의 편지였다. 그녀는 아버지가 목사(김유점 목사)요 오빠도 목사(김성칠 목사)로 목사 집안의 딸이었다. 그 때 그녀의 연령을 내가 알 수 없지만, 일본인들은 한국 젊은 여성들을 소위 정신대(挺身隊)로 끌어다가 일본군인들의 위안부로 삼는 시기여서, 젊은 여성이 정신대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결혼을 해서 어떤 사람의 아내가 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내가 며칠만 있으면 군대에 끌려간다는 사실을 알았을 터 인데도, 그녀가 나에게 결혼을 청한 것은 무언가 비장한 각오가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나와 당장에 결혼하여, 불과 수일의 결혼 생활 속에서라도 나 박씨 후손을 남겨주려는 생각을 한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자기가 정신대에 끌려가는 문제도 해결 될 것이다. 생각하면 참으로 그녀의 생각이 갸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를 생과부가 되게 할 수는 없고, 나 자신이 그런 결혼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고, 아버지는 수감 중이고, 해서 나는 어머니와 의논한 끝에 답장을 썼다. “당신의 청혼이 고맙기는 하지만, 허락할 수는 없습니다. 죽어 천당에서 만납시다.” 그런 간단한 편지를 다음 날 열차 안에서, 역시 말없이 전해주기만 했다. 그러나 내가 며칠 후 황주역에서 집결하여 열차로 경남 경화(慶和)로 떠나려고 할 때, 그녀는 세수 수건들과 삶은 달걀과 기타 일용품이 든 자루를 나에게 전해주는 것이었다.


박창환 목사

(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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