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기억에 남은 나의 생애의 편모(片貌)들

해방과 함께

해방과 함께 조국은 약동을 시작했다. 우리 동네(침촌)에도 건국 준비위원회가 생기고, 아버지도 중책을 맡았다. 이렇게 전국이 희망과 기쁨과 활기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이북은 러시아군이 점령하고 남한은 미군이 점령하면서 38선이 그어지고 허리가 잘렸다. 나는 신학 학업을 계속하려고 평양에 가보았다. 학교는 개강하고 학생들이 모였지만, 채필근 교장은 친일파라는 누명을 쓰고 러시아군에게 붙들렸고, 김인준 목사가 교장 직을 맡고 있었다. 새로운 기분으로 공부가 시작되었다. 과거에는 구경도 하지 못했던 신학교 도서관이 열렸다. 과거에 선교사들이 사용하던 책으로 가득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그 도서를 사용할만한 사람들이 없었다. 교수진은 전보다도 더 약했다. 38선이 막히면서 많은 민주 인사들이 남한으로 이주하거나 탈출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장연 서부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장연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나는 신학교 수업이 시원치 않아서 중단하고 아버지를 따라 장연으로 갔다. 거기에 지방성경학교가 개설 되었고, 나에게도 한 과목을 가르치라는 부탁이 있어서, 그 일에도 가담하였다. 그리고 동지들이 생겨서 시내에 중학교를 세웠고, 아동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택이 산기슭에 놓여 있었고, 그 옆에 최영일 선생이 살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문단에 글도 발표하는 문인이었다. 그가 나에게 동요를 써주며 작곡을 해 보라고 했다. 그때 만든 곡 두 개가 있다.


“반딧불 빤짝빤짝 불쌍도 하지, 하늘에서 떨어져서 외로이 빤짝 하늘에다 별님 두고 무엇 하려고, 혼자서 이 땅으로 내려 왔나요?”

“모래 언덕 남실남실 넘는 물결을 퐁당퐁당 퍼다가 누구를 줄까? 이웃집 복실이 네 세간살이의 밥 짓는 가마솥에 부어 줄까?

(이 둘째 동요는, 최영일 선생의 아이들과 같이 소꿉장난을 하면서 노는 복실이라는 아이가 이웃집에 살고 있었고, 언덕에서 흘러내리는 물을 흙담으로 막아 놓고 소꿉(세간살이)놀이를 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나는 혼자서 남하했지만, 서울 마포에 있는 도화동 교회를 담임하신 박기환 목사님(정주 오산교회 담임이셨던 분)과 그의 아들 박경화를 만나 그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하며, 생활비 보조도 받았다. 박 목사님이 당신의 가족생활에 보태기 위해서 미군 부대의 번역관으로 일하시면서 나에게도 일감을 가져다 주셔서 번역을 하며 보수를 받기도 했다. 그래서 생활에 어려움은 없었다.


겨울방학이 곧 돌아왔다. 나는 이남(以南)에 친척이 한 사람도 없는 처지라 갈 데가 없었다. 그러나 신학교 동급생인 정규오(丁奎五) 장로가, 비록 나이는 나보다 훨씬 위였지만, 나에게 자비를 베풀어, 자기 집으로 나를 데리고 내려갔다. 그는 전남 구례읍 구례 장로교회 장로이고 그의 장인은 내가 이미 평양신학교에서부터 안면이 있는 문재구 목사여서, 그 집에서 겨울방학을 잘 지내며 교회봉사를 할 수 있었다.


구례 교회에서 겨울 방학을 지내면서 사랑을 많이 받았고, 학비도 두둑이 받아가지고 어려움 없이 신학교 생활을 계속할 수 있었다. 가는 곳마다 하나님은 모든 것으로 내 생활의 부족을 채워주셨다. <계속>


박창환 목사(전 장신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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