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먼저 학교와 학생들, 소개를 좀 해주시겠어요?

함송이 교장 : 저희는 수지 선한목자교회(담임 강대형 목사) 산하의 학교로 2019년에 설립된 ‘생수의강 기독학교’의 학생들과 탈북 청소년들의 대안학교인 ‘하늘꿈 학교’의 학생들입니다. 저는 생수의강 기독학교의 교장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생수의강 기독학교는 크리스찬 리더를 양성하고자 하는 큰 그림을 가지고 시작된 학교인데 북한을 마음에 품고, 통일한국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통일세대에 생명의 통로를 세우는 하나님의 학교’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가지고 시작이 되었고, 긍휼·Project Based Learning이라고 긍휼을 실현할 수 있는 대상을 놓고 찾는 중에 감사하게도 아이들이 북한, 어린이, 고아들이라는 키워드 중에 북한을 대상으로 먼저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했는데 저희가 중국에 갔을 때 탈북 2세처럼 남겨진 아이들을 만나면서 북한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이 더 생기게 된 것 같습니다. 특히 저희 학교에서 수학교사로 일하시는 김영희 선생님이 북에 남겨진 가족들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 북한에 대한 애틋하고 간절한 마음이 생긴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 시작했고, ‘Unity in Christ’(UIC)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어서 새터민 학생들이 다니는 대안학교인 ‘하늘꿈 학교’와 협력을 맺게 되었습니다. 같이 여행중인 이 친구들은 하늘꿈 학교 학생들로 선한목자교회의 울타리 안에서 진행되는 이 프로젝트에 재학생과 졸업생들이 이번 미국에 오는 프로젝트를 같이 하면서 남과 북의 아이들이 한데 어울려 미국의 이곳 저곳을 둘러보는 중에 애틀랜타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들이 결국 UIC의 확장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작지만 너무나도 강한 인상을 주고 있는 이 브로셔는 무엇인가요?

함송이 교장 : 네, 마켓 앞에서 전도지로 사용한 것인데 어제 밤, 몇 명이 서로 탈북에 관한 인터뷰를 하고, 디자인까지 하여 이런 프린트물을 만들어 냈네요. 
이번에 몇몇 일정들이 있었지만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 따라 계획들을 캔슬하고 한인마트 앞에서 전도지를 나눠주다가 크리스찬타임스의 발행인이신 장로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탈생이라는 김수철 군의 이야기를 좀 듣고 싶습니다.

여기 모인 분들에 비하면 어린 제가 뭘 그렇게 말할 것이 있을 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현재 숭실대 1학년으로 컴퓨터를 전공하고 있습니다. 저는 북한 양강도라고 제일 추운 곳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저 농부의 자식으로 어려서부터 공부보다 농사의 일을 더 일찍 배우면서 유년시절을 보낸 것 같습니다.

워낙 가난하니까 부모님도 서로 사이가 좋지 않으셨어요. 다투시기도 하고 가정불화가 있었지요. 결국 아빠가 돈을 벌러 어디로 간다는 얘기도 없이 타지로 가셨는데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어요. 얼마 후에 아빠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한국에 와있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엄마가 아빠와 통화한 것이 발각되어 교화소에 가게 되셨는데 내가 10살 때 아빠가 탈북하셨고, 어머니는 제가 16살때까지 교화소에 계셔서 저는 부모가 없는 상황에서 할머니, 남동생과 살며 너무나 힘들고 외로웠습니다.

그때는 내 운명에 대한 좌절, ‘믿을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다.’ ‘돈이 최고다.’라는 생각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엄마는 여러 번 실패를 하면서도 자식의 미래를 위해서도 한국에 끝까지 가야겠다는 결심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어요. 제가 원해서 탈북했다기 보다는 부모가 저를 이끌어서 탈북한 것 같아요. 북한에서는 한국보다 고등학교를 일찍 졸업합니다. 군대를 가야하는 의무감이 있어서 신체검사를 하는데 엄마는 전과자에, 아버지는 탈북자여서 저는 대학은 물론 군대에도 들어갈 수 없다 더군요. 너무나 큰 좌절감에 ‘이렇게 개처럼 살다가 죽는 것이 내 운명이구나.’ 싶었어요.

결국 18살 때 탈북을 시도했는데 전도지에서 밝힌 것처럼 중국 공안에 붙잡혀서 평생 맞을 매를 다 맞은 것 같아요. 죽음의 고비에 맞닥뜨리니까 하나님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찾으며 애통하게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때만큼 간절했던 순간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영접한 계기였던 것 같아요. 그때가 불과 3년전인 2019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한국서 10년의 시간을 이미 사셨고, 중국에 아는 분이 계셔서 돈을 들여 저를 빼오기로 했습니다. 중국은 뇌물이 아직도 통하는 나라라 중국 공안에 돈을 주고 매수, 아빠가 10년 동안 벌어서 모은 돈 1억 5천만원에다가 출석하시는 교회에서 5천만원을 보태주어 풀려나게 되었습니다. 

국정원에 와서 보니 성경책을 주어 보게 되었는데 북한에서는 금지된 책이라 손이 떨리는 겁니다. 북한에서는 ‘성경책’하면 반국가적 범죄를 지은 것보다 더 엄청나게 보거든요. 찬송가가 나오는데 저의 가슴을 찡하게 하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북한서보다 몸이 편해지니 하나님을 중국 감옥에 있을 때처럼 간절하게 찾질 않게 되더군요. 잠시나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나 자신을 회개하게 되었고, 이번 UIC 프로젝트를 통해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 어떤 변화가 있었어요?

북한에서의 삶을 생각해보면 저도 방황했던 시절이 많았어요. 거기서는 싸움도 하고, 도둑질도 하고, 강도질도 하는 등 나쁜 짓을 많이 했습니다. 이곳에 와서는 안 하던 공부를 해야 했는데 적성에 맞는 것을 보면서 내가 이렇게 머리가 좋았나 하면서 나 자신도 놀라고 있습니다.(웃음) 어떤 친구들은 공부가 힘들다고 하는데 늦게 공부를 시작했지만 저는 재미있어요. 훌륭한 사회인으로 나의 자리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도 좋은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합니다. 옛날에는 잘 먹고, 잘 사는 것만이 최고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교회의 도움도 많이 받으면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들을 통해 나에게 베풀어준 은혜를 나도 여러 사람들에게 보답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많은 크리스찬들을 만나면서 그들에게는 평안이 있는 것을 보았고, 저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학생도 한 말씀 해주실래요?

탈북청년 이명군 : 네, 제 이름은 이명군입니다. 한동대학교 학생이고, 자율 전공이라 아직 전공을 정하진 않았습니다. 저는 수철이와 국정원에서 만났고, 하나원도 같이 나왔어요. 나이도 동갑이고요.
저는 백두산의 삼지연에서 태어나 9살까지 거기서 살았습니다. 누나가 2명 있었는데 북한에서는 나가서 일을 못하면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여겨요. 큰 누나가 집안에 부담될까봐 자신이 중국에 가서 일을 하겠다 하여 부모님도 승낙을 했습니다. 

우리는 ‘큰 누나가 부자집에 양딸로 가는구나’라고만 생각했습니다. 인신매매가 있는 줄을 당시 알지도 못했습니다. 작은 누나와 저만 남았는데 우리 둘을 부양하기 힘들었던 부모님은 우리를 한 명씩 맡기로 하여 저는 어머님을 따라 해산으로 내려왔고, 작은 누나는 아빠와 삼지연에 남았습니다. 해산이라는 큰 도시를 보면서 공부를 하고 싶었어요. 꿈을 가지게 되었지만 어머니가 나를 부양하면서 공부를 시키기에는 역부족이었어요. 

북한에서는 개인이 살아가려면 불법을 저지르지 않고는 살 수가 없어요. 중국에 약초도 넘기고, 밀수도 하던 어머니가 보위부에 잡히면서 감옥에 2년 정도 있게 되었어요. 저 혼자서 2년을 살아야 되니까 할아버지 집에 가서 6개월을 지내고, 삼촌 집에서도 몇 달 살고 했어요. 게다가 어머니의 언니가 큰 죄로 정치범 수용소로 가게 되었는데 그 바람에 어머니 형제들이 모두 감옥으로 보내졌습니다. 집안에는 아이들만 남아 살게 되었는데 모두 꽃제비의 삶을 살게 되었지요. 6개월 후, 어머니가 감옥에서 나오셨지만 보위부에서 모든 것을 가져갔기 때문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다시 작은 누나와 중국으로 돈을 벌러 가시고, 저는 다시 혼자서 한 달을 살았어요.

그리고 제가 15살이 되었을 때, 사촌형들이 남한 노래를 듣는 것을 보고 저도 듣다가 USB를 친구에게 주었는데 그 친구가 보위부에 잡혀서 제가 준 것을 말해버렸습니다. 저도 잡혀서 USB 출처를 대라고 하는데 그걸 말했다간 저의 사촌형들까지 잡히게 생겨서 끝까지 주웠다고 말했어요. 엄청 때리더군요. 처음에는 아프다가 나중에는 감각조차 없었어요. 제가 말하지 않으니까 4층의 철창방에 저를 가둬 놓았어요. 먹을 것을 주지 않으면서 구타와 함께 20일이 경과되었을 때 4층에서 뛰어내렸습니다. 당시에는 아프다는 감각도 없었어요. 집으로는 가지 않고 6개월 정도를 숨어 지냈습니다. 마침 어머니와 연락이 닿았고, 탈출하라고 보내준 돈도 받았는데 브로커에게 전부 사기를 당하고 말았어요.

맥을 놓고 있는데 고향 형님을 길에서 우연히 만나 나의 삶을 말했지요. 뭘 도와주랴고 말하길래 중국에 가고 싶다고 하니 그건 도와줄 수 있다고 해요. 6월 25일에는 북한의 모든 사람들이 미제 침략자들 타도하라는 시위를 아침부터 하는데 보위부 사람들도 모두 가니까 그때 형을 만나 중국으로 가려고 했었죠. 그렇게 가는 도중에 경비대에 붙들리고 말았어요. 일단 잡히면 이번에는 살 길이 없겠구나 했는데 이번에도 그 형이 지나가다가 나를 보고 자기 동생이라고 하면서 저를 도와주었습니다. 저를 데리고 가서 밥을 주는데 입쌀밥에 계란에 미역국까지 너무나 맛있었습니다. 형 말이 군대들은 늘 이렇게 먹는대요. 그렇게 거기서 몇 시간을 있다가 두만강을 넘었습니다.

강은 넘었는데 중국 핸드폰이 신호가 전혀 안 잡히는 거예요. 어머니에게 연락을 해야 하는데 위로 가야 하는지, 아래로 가야 하는지 막막한 겁니다. 무조건 두만강을 따라 내려가는 길로 걸었어요. 둘째 날에는 탈수가 와서 걸을 수조차 없었어요. 길바닥에 사람들이 버린 물병에 남은 물로 연명하며 사흘째 날을 맞았어요. 초소가 보이는데 그땐 스스로 들어가서 잡혀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그 순간 전화기를 보니 안테나가 한 줄 뜨고. 7%의 배터리가 남아있다고 떠요. 얼른 어머니에게 전화하여 초소가 있고, 풀을 쌓아 놓은 곳에 있다고 하고 저는 잠들어 버리고 말았어요.

여자 두 명이 나를 깨웠는데 그들중 누가 어머니인지 몰라봤습니다. 11살인가 12살 때 본 엄마여서… 알고 보니 어머니도 인신매매로 팔려 갔더군요. 그 남자 집에서 살 수는 없어 일할 곳을 찾아달라 하여 식당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몸이 나빠져서 사장님께 2년간 일한 월급을 달라하니 줄 수가 없다며 받으려면 경찰서에 신고하래요. 아, 정말 모든 것이 다 허무하고, 싫었습니다. 그때 친 누나는 아니지만 알고 지내던 누님이 한국으로 들어오라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 누나가 교회의 목사님을 소개시키며 한국으로 오라고 하길래 그러겠다고 했죠.

저는 중국을 떠나던 그 즈음에 하나님을 만났어요. 그전에 한국 사람들이 밥 먹기 전에 기도하는 것을 봤지만, 저는 그런 것을 믿지 않았거든요. 목사님은 힘들 때나, 어려울 때 기도를 하라고 하는데 저는 기도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어요. 보이지도 않는 존재에게 중얼중얼대는 것이…. 그러다 한국으로 떠나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다 공안에게 붙잡혔어요. 목사님이 기도하라고 했던 생각이 나서 믿겨지진 않았지만 기도했습니다. 조금 있다가 공안이 오더니 가라고 하길래 뛰어 도망했습니다. 브로커에게 그 얘길 했더니 그도 믿지 않았어요. 그런 일은 없다면서. 버스를 탔는데 7번의 신분증 검사를 했는데 나만 한 번도 하지 않았어요.

‘하나님만 믿겠습니다.’ 하는 기도를 계속 했고, 베트남까지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하노이에서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면서 저희의 한국행도 계속 연기되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의 사인 거부로 6개월을 베트남에 머물게 되었어요. 저희 젊은 사람 다섯 명은 개인집에 머물렀는데 그분들이 기독교인 집사님 부부였던 것 같아요. 제가 보기에 진실된 크리스찬들의 공통점은 집 안에 텔레비전이 없더라구요. 그렇게 2019년에 완전한 탈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국에서 대학교 입학지원서에 대학교를 졸업해서 무엇을 하겠냐는 질문이 있었는데 뭐라 적을지 막막해요. 고민하고, 상담도 받다가 어느 날 기도하는 중에 고향 땅이 생각나면서 눈물이 나더라고요. 하나님께서 2300만 북한 백성 가운데 나를 선택하셔서 살려주셨는데 단순히 저만 위해 사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가장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통일을 준비하라는 마음을 주셔서 법학을 선택하고, 법적인 공부를 할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반도가 통일될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고 싶고, 통일이 되었을 때 부작용이 없는 법을 만들 수 있을까도 고민하고 싶습니다. 

한 소년의 이야기

살얼음이 얼어있는 압록강의 11월 새벽, 청년과 그의 어머니는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자유는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중국에서 누린 8시간의 자유가 전부였고, 공안에 잡히게 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청년은 죽음의 땅에 돌아가기보다 차라리 죽음을 먼저 선택하기로 했습니다.
죽기위해 쇠 조각을 먹었지만, 죽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일어나니 병원의 한 쪽 구석이었습니다. 물을 달라고 했는데, 돌아오는 것은 매가 전부였습니다. 열 명이 고무 방망이로 돌리면서 때렸는데, 피오줌이 열흘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때 감옥에서 한 점의 빛을 보았습니다.
누군가가 자신의 피로 감옥 벽에 십자가를 그려 놓았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위로를 느끼면서 처음으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하나님께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때 지금까지 당했던 모든 수모의 설움이 북받쳐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작은 몸뚱이를 유지하기 위해 치러야 하는 고통이 너무나 가혹했습니다.
이후 한국에 계시는 아버님이 대한민국 외교부에 아들을 살려달라고 부탁을 했고, 청와대에 국민청원도 했지만 누구도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집안의 전 재산을 팔고 돈을 빌려서 모자는 한국에 왔지만, 눈물로 찾은 자유가 너무 서러웠습니다. 그때 그 설움을 함께 나눠준 곳이 교회였습니다. 그리고 진짜 자유를 안겨준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에베소서 2:13)

오늘 귀한 간증들을 들려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통일을 위한 브리지의 역할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길 기도합니다.

LWCA 생수의강 기독학교  Website : www.lwca.online / Email : songyi.ham@gmail.com

대담 이윤태 발행인·정리 한상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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