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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조선, 구한말 미국 선교사 열전 5

Louis H. Severance(세브란스) 장로

박흥배목사 | 등록일 2019년06월28일 09시38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Louis H. Severance(세브란스) 장로
Louis H. Severance (1838-1913)

 

1884년 조선에 온 최초의 공식 선교사 앨런(Allen)은 목사가 아니라 의사였다. 그는 정부의 도움으로 조선 최초의 서양식 병원인 광혜원을 세웠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자 이 병원에 대한 정부의 간섭과 병원을 주관하는 관리들의 부패가 심해져서 원성이 컸다. 결국 선교사들은 재산권과 운영권을 자신들에게 넘겨주지 않으면 철수하겠다고 통보했고 오랜 협상 끝에 조선 조정은 선교사들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광혜원의 세번 째 원장은 알렌의 요청으로 캐나다인 에비슨(Oliver Avison) 박사였다. 1893년 우리나라에 온 그는 병원 발전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는 병원의 수준을 높이려고 애썼는데 에비슨이 처음 도착했을 때 병원은 조선식 단층건물로 12.5평 크기였다고 한다. 그는 설계사에게 부탁하여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현대식 병원을 설계토록 했다. 비용은 1만달러 정도가 소요될 예정이었다.
 
1900년 4월 21일 에비슨은 뉴욕 카네기홀에서 열린 해외선교대회에 참석, 그가 꺼낸 이야기는 조선 최초의 서양식 국립병원인 제중원에 대한 것이었다. 병원에 대해서 연설을 하게 되었는데 청중이 너무 많아서 겁을 먹었다. 그래서 두번째 발코니 맨 뒤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시키면서 ‘저 사람이 들을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도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사람이 바로 스탠더드 석유회사(록펠러가 창업)의 CFO(재무담당)이던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였다. “안정적으로 40명 이상을 수용할 병원이 필요합니다. 조선은 선교사들이 활동하기에 제약이 많은 편입니다. 하지만 의료선교만큼은 제재가 없습니다. 복음 실은 의술을 펼치려면 우선 제대로 된 병원이….”

 

보고가 끝나자 백발의 신사가 무대 앞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였다. 루이스 헨리 세브란스는 1838년 8월 1일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 시에서 태어났으며 록펠러와 함께 ‘스탠더드 오일’을 설립한 대주주로 ‘석유왕’으로 불리던 인물이었다.
“병원이 필요하시다고요. 마침 선교지 어딘가에 병원을 짓기 위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클리브랜드의 우드랜드 에비뉴 장로교회의 장로이기도 했던 그는 연설이 끝나자 에비슨을 찾아와서 계획에 대해 자세히 물었다. 에비슨은 이미 설계도까지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늦은 시간까지 에비슨과 제중원 증축에 대해 대화했다. 세브란스는 다시 한 번 감명을 받았다. 얼마가 필요하냐고 묻자 에비슨 1만 달러만 있으면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얼마 후 세브란스는 1만 달러를 기부하겠다고 밝혔다. 실제로 당시로서는 거액이었던 5만 5000달러를 기부해 1904년 세브란스 병원을 설립할 수 있게 했다. 당시 노동자의 한 시간 임금이 5센트였으니 얼마나 큰 거금이었는지 상상이 가는가? 미국의 온라인 미디어인 ‘비주얼 캐피털리즘’이 지난해 발표한 ‘연도별 달러가치’ 자료를 보면 1900년 1달러는 2019년 350달러에 해당된다. 지금 가치로 1375만 달러(약 154억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세브란스는 “주는 기쁨이 받는 기쁨보다 훨씬 더 크다”는 말을 남겼고, 이 말은 세브란스 병원의 정신으로 자리잡게 되었다고 한다.
 
1902년 세브란스의 기부금과 기존 병원 판매 대금을 합쳐서 서울역 맞은편에 병원을 짓기 시작하였다. 마침내 1904년 11월 세브란스 병원이라는 이름으로 개원하였다. 그리고 그해 미국 장로교 부총회장이된 세브란스는 조선에 와서 감격의 세브란스 병원 개원식에 참석한 것이다. 이렇게 조선 최고의 병원 세브란스는 한 의료 선교사의 비전과 헌신적인 기독인 사업가의 헌금으로 이뤄지게 되었다. 이후에도 그 후손들을 통해 세브란스의 기부가 아직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클리블랜드의 세브란스 홀은 세계적 교향악단인 클리블랜드 교향악단의 본거지로, 1928년 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들인 존 세브란스가 지어 기증한 것이다. 루이스 세브란스의 아들과 딸은 자식을 낳지 못해 그의 직계 후손은 없다.
 
세브란스 가(家)의 자선은 서울 세브란스병원에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병원에는 지난 50년 동안 ‘미국 북장로교회 (PCUSA)’ 명의로 매년 후원금이 입금됐었다. 병원 직원들은 그냥 “미국 교회가 좋은 일 하나 보다”라고 생각 했다고 한다. 그런데 개원 120년을 맞아 병원측이 추적해보니 돈의 출처는 아들 세브란스가 만든 기금이었다고 한다. 루이스 세브란스는 ‘석유왕’ 록펠러와 함께 세운 스탠더드 석유회사의 대주주 겸 회계담당 이사로 있으면서 많은 자선사업을 했다. 그의 유지(遺志)를 받들어 만든 ‘세브란스 펀드’(미국 북장로교회가 관리)는 100년이 넘게 세브란스 병원을 후원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세브란스 장로는 미국, 조선, 중국, 일본, 그리고 인도의 학교, 병원, 교회건립과 자선사업을 위하여 현 싯가로 7000억원 가까운 거금을 기꺼이 헌금 내지 기부한 하나님의 사람이다. 1913년 세상을 떠난 세브란스는 “재산을 쌓아두지 말라. 반드시 필요한 곳에 정성을 다해 나눠주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지에 따라 아들 존 세브란스도 1934년 숨질 때까지 세브란스 병원에 12만 4500달러를 기부했다. 이 사실도 시간이 지나서야 알려졌다.
 
여기서 우리가 유의할 점은 세브란스 장로의 기부는 그가 다니던 우드랜드 에비뉴 장로교회(Woodland Ave Presbyterian Church of Cleveland) 명의로 헌금한 사실과 그의 사후에는 장로교 해외선교 단체 명의로 하였다는 것이다. 세브란스 장로는 오하이오 주와 펜실베니아 주의 수많은 대학교를 설립, 지원하였고, YMCA 주요한 후원자였으며, 장로교 해외 선교회의 주요한 임원이었으며, 조선을 방문하던 1904년, 장로교 총회 장로 부총회장으로 수고하였다. 1913년 6월 25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 그가 자라고 성장하였던 클리블랜드 근교에 안장되었으니 향년 74세였다.  <계속>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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