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 Heron(헤론) 선교사 ②
John W. Heron, June 15, 1856 – July 26, 1856 (Entering Korea in 1885)

선교사 게일의 증언에 따르면, 1890년 헤론 선교사는 극심한 이질에 걸려 고종이 내준 휴양처였던 남한산성에서 요양을 간다.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 그는 서울로 돌아갔지만, 얼마 되지 않아 16마일 떨어진 곳에 한 여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출발해 그 여인을 진료했다. 그 여인은 살아났다. 하지만, 헤론 선교사는 이때 다시 병이 악화되어 결국, 34세에 나이로 숨을 거둔다. 조선에 온지 6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때까지도 서울에는 변변한 외국인 묘지조차 없었다. 당시 선교사 공동체는 조선 정부에 그의 시신을 묻을 매장지를 마련해 줄 것을 요청했다. 늑장을 부리던 정부를 도저히 기다릴 수 없어 헤론 선교사가 살던 집 뒤편에 무덤을 쓰기로 하고 땅을 파기로 했지만, 조선의 풍습 상 사대문 안에는 시신을 매장할 수 없었기 때문에 알렌, 언더우드, 아펜젤러, 벙커 선교사가 매장지를 물색하게 됐다. 그렇게 한강변에서 멀지 않은 서울 서대문 바깥 4마일 정도 떨어진 작은 언덕, 양화진에 선교사 헤론을 묻을 수 있었다.

헤론 선교사가 한국 선교에 공헌한 점은 여덟 가지 정도로 평가할 수 있겠다. 첫째, 제중원의 두 번째 원장(1885∼1886)으로서 수많은 환자를 치료하면서 개신교 선교 사업의 기초를 놓았다. 둘째, 구리개(을지로의 옛 지명) 제중원의 2대 원장 겸 고종의 주치의로서 제중원 진료를 본 궤도에 올리고 근대 의학 교육을 시작했다. 셋째, 의료사업을 통해 넓은 의미의 선교, 곧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실천했다. 넷째, 1887년 성서번역위원회가 조직될 때 번역위원으로 성서번역에 참여했다. 다섯째, 1889년 10월 선교회 공회의가 조직될 때 회장으로 수고했다. 여섯째, 1890년 6월 대한성교서회(大韓聖敎書會, 대한기독교서회 전신)를 조직하고 전도책자 번역과 출판에 기여했다. 일곱째, 정동 사택에서 한국인들을 전도했다. 마지막으로 1890년 그의 죽음을 계기로 양화진에 외국인과 선교사들을 위한 묘지가 마련되었다. 그의 시신 조차 타인을 위해 봉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5년의 짧은 선교사 생활이었지만 헤론 선교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과 성경을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번역하고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의 섬기는 종으로 살았다.

당시 조선은 불결하고 위생 관념도 없어 전염병이 철 따라 돌았는데 헤론은 밤낮으로 환자 치료에 전력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고 밤에는 성경번역으로 과로가 쌓여 결국 이질에 걸려 33세의 젊은 나이로 소천하게 된다.

헤론 선교사는 그의 병상을 지키던 아내와 언더우드 선교사에게 “나의 사역은 참으로 보잘 것 없었지만 모두가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고 고백하였다. 그의 묘비명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주셨다”고 쓰여 있다.

헤론 선교사의 아내 해티는 33세의 미망인으로 평소 헤론과 가까웠던 선교사로 30세의 총각이었던 게일 선교사와 1892년 재혼하였다. 둘 사이에는 자녀가 없고 헤론 선교사와의 사이에 딸만 둘이 있었다.

해티는 1907년 두 딸과 한국을 떠났다가 스위스에서 다시 돌아와서 1908년 결핵으로 서울에서 소천하여전 남편 헤론이 묻혀있는 양화진에 묻혔다.


박흥배 목사
안디옥 세계선교협의회 회장
왈브릿지 열방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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