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님은 언제부터 하나님을 믿게 되셨어요?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잠깐 해볼께요. 저의 고향은 경기도 개풍군 중면 천덕리로 마을 앞으로는 개울이 흐르는 아주 조용한 마을이었어요. 제가 살던 집의 뒷마당에 우물이 있는데 증조 할머님이 살아 계실 때 “얘, 우물 맛이 변했다? 세상이 변하려나 보다.” 이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나서 6.25가 바로 터지고 저는 일곱 살때 피난을 내려왔죠. 노할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엄마와 누이들은 모두 그대로 놔두고 아버지와 저, 그리고 동네 청년들만 피난을 떠나게 되었어요. 서울 북아현동에 할머님이 둘째 아들 뒷바라지를 하느라 계셨는데 저희도 그 집에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저를 할머님께 맡기고 아버님은 입대를 하시게 되었어요. 그 후에 아버님은 노할머님과 어머니, 누이들을 데리러 올라가신 사이에 38선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저는 할머니와 삼촌과 피난 열차를 타고 겨우 겨우 대전까지 도착했는데 열차는 더 이상 움직이질 않는 겁니다. 할머님 말로는 제가 내려서 걸어가자고 계속 졸랐다고 그래요.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그 기차가 폭격을 맞아 열차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다 죽었다고 하더라구요.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말이 실감이 납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생명을 보전하게 된 저는 고등학교 1학년때 교회를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희한한 것은 그 누구의 전도도 받지 않고 스스로 교회에 가게 된 것이죠.
교회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 다음 주부터 학생회장이 되는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예배를 어떻게 드리는지도 몰랐을 때였습니다. 다음 날부터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권사님들과 목사님의 기도를 받아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기도하는 법, 예배들을 배워 나갔습니다.

성경이 무엇인지 알고 싶은 생각이 들어 이듬 해 여름부터는 40일동안 성경 통독에 열을 올리기도 했습니다. 그때가 한성고등학교 2학년때였어요. 요셉이 애굽에서 형제들을 만나 대성통곡할 때의 장면을 읽으면서 저도 부모님들과 누이들이 보고 싶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일곱살때까지는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아버지라고 불렀고, 그 이후 열 일곱살때까지는 작은 아버지를 아버지로 여기고 살았는데, 열 일곱 이후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면서 살았습니다.
당시 간이 붓는 간부화증을 앓고 있었는데, 세례를 받으면서 고침도 받았습니다. 세례를 받는 순간 뭔가가 내 몸을 위에서 아래까지 주욱 훓어내려가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이후로 몸이 완전히 치료되어 지금까지 건강을 잘 유지하고 있습니다.

사모님께 좀 여쭐께요. 세 따님들(혜진, 지영, 지혜) )을 '류트리오'라는 음악인들로 훌륭히 키우셨는데 사모님은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게 되셨어요?

저는 어려서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목사님 딸이어서 목사님 사택으로 잘 놀러다니곤 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피아노 레슨을 받는데 그게 너무나 부러웠어요. 그때 시골교회에는 오르간이 있었잖아요? 그래서 나도 피아노 건반을 그려서가면서 배우고, 교회의 오르간으로 연습을 하곤 했습니다. 고등학교 때는 이미 교회의 반주를 할 만했고, 이후 서울에 올라와서는 본격적으로 공부를 하게 되었죠.
신앙적으로는 고등학교 때 주님을 영접하고, 성령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피난 내려와 남의 집 살이를 하던 교회의 언니가 있었는데 그 언니가 피난오기 전에 아버지랑 늘 새벽기도를 다녔답니다. 그런데 이 언니가 새벽마다 우리 집 문빗장을 열어서 저를 깨워가지고 교회로 데려 가는 겁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새벽기도를 다니게 되었어요. 그게 중학교 3학년때였는데 내일 시험이 있던 없던 그 언니는 막무가내였어요.

합주중인 류트리오

그렇게 기도생활을 하다가 성령의 은사를 받았는데 학교에서도 공부하다가 눈을 잠깐 감으면 마치 스크린이 펼쳐 치듯이 어떤 장면들이 보이곤 했습니다. 그때는 어렸기 때문에 '이게 뭐지' 하면서 겁이 나곤 했어요. 교회의 미리 될 일이 보이고, 이후에는 그대로 일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때부터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저희 가정은 조부모님대에서는 교회를 세울 정도로 믿음이 돈독했었는데, 저희 부모님 대에서는 믿음을 저버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빠가 아프게 되니까 무당을 부르기도 했고요. 그렇게 믿음이 중단된 듯했는데 제가 새벽기도를 나가기 시작하면서 온 가족의 믿음이 다시 회복되어 지금은 모두 믿음생활을 잘하고 있습니다.
딸 셋을 낳고 살던 중, 남편이 목회를 하겠다고 할 때 반대를 많이 했습니다. 아이들이 이제 중학교, 초등학교로 줄줄이 있는데 무슨 목회를 하냐고 했었죠. 목사님이 한다는 일을 반대할 때 제가 항상 아팠던 기억이 있는데 그럼에도 반대를 하자 그때 엄청 큰 천사가 칼을 목사님의 목에 갖다대는 환상을 보게 되었어요. '순종을 안하면 죽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어 바로 생각을 바꿨습니다.

결국 목회를 도우시게 되었는데, 쉽지 않으셨을 것 같아요.


남편이 목회를 하기 전에는 제가 음악학원을 했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학생들을 많이 보내주셔서 학생들이 콩쿨에 나가면 늘 1등을 하고, 대상을 타고, 문화공보부상까지 타곤 했습니다. 저도 여러 학교에서 강사로 초청받기도 했고, 약사합창단을 맡아 가르치키도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교회를 개척하게 되니까 아이들 키우랴, 학원을 운영하랴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큰애는 4살때부터, 둘째는 7살때부터 생일선물로 바이올린을 주어 가르쳤고, 셋째는 5학년때부터 첼로를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을 기르면서 '이 아이들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도구가 되게 해달라'고 늘 기도했습니다. 아이들이 입시준비를 하면서 레슨도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가난한 개척교회 목사의 재정으로는 감히 유명한 교수님으로부터 레슨을 받는 것은 엄두도 못낼 상황인지라 '하나님, 이 딸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찬양하는 도구로 사용되길 원하니까 선생님도 제일 좋은 선생님을 허락해주세요.'라고 기도만 했습니다. 돈은 없으니까 그저 믿음만 가지고 기도했던 거죠. 알지도 못하는 선생님에게 무조건 전화를 하여 테스트를 받게 해달라고 졸랐습니다. 테스트 후에 다행히 교수님은 아이를 맡아 주셨구요. 이화여고 백주년 기념행사때에 큰 아이가 독주자로 연주를 하게 되었을 때도 '하고 싶으면 하나님께 매달려 작정 기도를 해라'고 할만큼 자기를 위한 기도에 스스로 응답받으라고 했어요. 저는 먹고 사는 것도 힘들만큼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거든요. 독주자를 뽑는다니 엄마들 치맛바람이 엄청났었죠.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그 아이의 기도도 들어주셔서 독주자로 세워 주셨습니다.

둘째는 형편도 안되는 와중에 대학을 가는데 악기가 변변치 못한 겁니다. 사실 현악은 악기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그때 당시에 음악한다는 아이들은 전부 잘 사는 집 아이들이었지, 저희 같은 가난한 목회자의 자녀들은 없었어요. 둘째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일할 때인데 항상 악기에 대한 불만이 있었어요. 제가 피아노 학원을 하니까 알게 된 피아노 조율사 한 분이 계셨어요. 그분이 말씀하시길 한양대학교 교수님 한 분이 독일에서 공부할 때 가져온 악기가 있는데 허름하기는 하지만 이걸 누군가 바이올린을 잘 하는 아이한테 주고 싶다고 해서 우리 지영이한테 악기가 오게 되었어요. 그래서 가서 악기를 보았는데 어쩌면 그렇게도 허름한지…. 너무나 낡았고, 줄도 허름하고… 당시 돈으로 50만원을 주고 수리를 했어요. 우리나라에서 바이올린을 가장 잘 고치시고, 만지시는 분께 가져갔더니 '이거 아주 좋은 악기'라고 하데요. 나중에 알게된 그 악기는 과르네리(Guarneri) 카피본 이라고 하더군요. 둘째는 지금도 그 악기를 쓰고 있어요.


첼로를 전공한 지애도 변변한 악기를 사줄 수 없어 제가 악기점에 가서 늘 구경만 하니까 악기점 사장님이 교회로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수입금지였던 악기 수입이 풀려서 처음으로 들어온 첼로가 있는데 그것을 가져가라, 학교에 들어가 네가 갚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조금씩 갚아나가라”고 하여 악기가 생겼어요.
세 아이들 모두가 하나님의 세심한 배려와 베푸시는 은혜 가운데 자랐고, 지금은 모두 자기의 자리에서 믿음 생활을 잘 하고 있습니다.

이번 호부터 성경의 3장 16절에 관해 연재를 하시는데 특별히 연구하게 된 계기가 있으셨어요?


대학을 졸업하고 한국탄산주식회사에 들어갔는데 꽤 잘 나갔어요. 큰 집도 사고요. 놀기도 좋아해서 바둑을 한 번 두면 이틀이고, 삼일이고 두었어요. 10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 모았던 돈을 모두 날리고, 쫄딱 망하는 상황이 되었어요. 부끄러운 얘기지만 그날도 며칠 밤을 바둑을 두고 초췌한 모습으로 집으로 오니 집사람이 아침을 차려놓고 아무 소리를 안하고 먹으라고 해요. 다 먹고 나니 아내가 '갑시다' 하는 말에 따라 나서서 제3여의도 대교로 갔습니다. 아내가 '여기서 우리 죽읍시다'하는 겁니다. '그래, 이왕 죽을 바에 기도나 하고 죽자' 해서 바로 옆에 있는 여의도 순복음교회로 갔어요. 그 때, 목사님의 설교가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세번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어보시는 장면이었어요. 설교 중에 요한복음 3장 16절 말씀이 내게 스며들면서 '하나님, 정말 잘못했어요.'하고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이렇게 사느냐' 하시는 말씀일 들렸습니다.


그 때가 신학을 하기 전이었으니까 82년쯤 되었을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성경통독을 했던 고등학교 때 하나님은 저를 택하셨던 것 같아요. 노인대학의 설교를 할 때 마다 내가 받은 그 많은 은혜를 들려줘야 겠다는 생각에 2019년부터 찬찬히 준비를 했습니다. 하다보니 성경 66권 속, 각 성경의 3장 16절을 공부하게 되었고, 마침 준비된 것을 크리스찬타임스를 통해 나가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목사님은 언제 신학공부를 하시게 되었어요?


마포의 용강동 가나안교회 조돈환 목사님이 시무하시는 교회를 다녔는데 하루는 목사님께서 금식을 하러 가신다고 하여 저도 돕겠다며 같이 금식을 시작했는데 정작 목사님은 하루만에 내려오셨어요. 나는 열흘 정도 지나면서 고린도전서 6장 11절의 말씀을 받았는데 말씀에서 세상의 죄악들을 주욱 열거한 후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하는 말씀이 갑자기 성경 안에서 튀어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열거하신 모든 죄악의 씻음을 저도 받았습니까?” 여쭐 때에 그렇다는 확신이 오는 겁니다. 그러면서 주의 길을 가기로 결단한 것이지요. 이때가 1983년도였어요. 그렇게 신학을 하고, 신대원을 거쳐 88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어요. 졸업 후에는 천성장로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했습니다. 정말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미국에 오셔서는 어떻게 지내셨어요?


2000년에 도미해서 당시 유영선 학장이 하던 애틀랜타한인노인대학의 사역을 도와주면서 시니어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어요. 이후 노인대학을 제가 맡으면서 수 많은 시니어들과 울고, 웃으며 세월을 보냈습니다. 지금은 펜데믹으로 쉬고 있지만 상황이 좀 나아지면 그 분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을꺼란 기대가 큽니다.

살아오시면서 인생에서 나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가장 큰 복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빌립보서 2장 4절에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라는 말씀처럼 나보다 남을 섬기는 것이 큰 기쁨인 것 같아요. 제가 할머니 손에 자라서인지 할머니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만나는 할머니들을 보면 '내 할머니다'라는 생각으로 그분들을 대합니다. 저는 이 분들을 돌보고, 마음을 어루만져주는 것이 저희들에게 큰 복이라고 생각해요.

사모님 : 최근에 교통사고가 크게 났었어요. 자동차가 크게 망가지고, 개스가 새어나오면서 정신이 가물가물하는데 말씀이 먼저 생각나는 겁니다. 사고가 크게 났으나 앰뷸런스가 올 때까지 말씀이 나를 장악하고 있는 것을 느꼈어요. 이렇게 말씀이 저를 주장하는 것이 복중에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담 이윤태 발행인·정리 한상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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