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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넘치는 축복 속에 걸어온 나의 삶

모스크바 장신대의 부름

크리스찬타임스 | 등록일 2018년06월22일 18시41분 트위터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모스크바 장로교회 예배당이 신축된 모스크바 선교센터 건물 외관.

 

 

 

탁월한 사업 능력과 신앙을 겸전한 이흥래 장로는 러시아 공산주의가 몰락하자마자 러시아 선교에 뜻을 두고, 누구보다도 먼저 러시아 선교를 시작했다. 죽기 전에 10,000명을 전도하겠다는 결심을 성취하기 위해서였다. 신학교를 세워서 러시아 본토인 목사들을 길러내어 100 교회만 세우면, 그리고 한 교회가 100명 만 전도하면 그 뜻이 이루어진다는 간단한 계산을 가지고 모스크바 장로회 신학대학을 세우고 날쌔게 대학 인가를 받아냈다. 이의호(李義鎬) 목사를 초대 학장으로 모시고 수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을 비롯하여 사방에서 우수한 교수들을 초청하여 강의를 시키는 방법으로, 가급적 비용을 절약하면서 학사를 운영하였다.


1996년 봄에 이흥래 장로로부터 강의 부탁을 받은 나는 호기심을 가지고 모스크바를 방문하고, 강의도 하고 공산주의 금단의 나라였던 나라의 여러 곳을 구경도 하였다. 그런데 그 해 가을에 나더러 다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인도네시아 선교 25주년 기념행사에 다녀온 후 다시 모스크바로 향했다. 이번에는 장기 체류를 하며 가르치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그 요구에 응하기로 하고, 이어서 이의호 목사 후계자로 학장 책임까지 가지고 일을 하게 되었다. 러시아 본토인들을 가르쳐서 목사를 만드는 작업, 그리고 러시아 군대 고급 장교들에게 신앙 강좌를 하는 일 등 매우 보람 있는 일들이었다. 만 5년이라는 세월을 러시아 선교에 동참하는 영광을 가졌다. 나의 임기 동안에 PCUSA 선교사 강요섭 목사가 협력해 주었고, 샌프란시스코 신학교 은퇴 교수 허만 웨이첸(Herman Waitzen) 박사도 두 번이나 와서 강의를 해 주었다.


그러나 모스크바 신학교가 좀 더 정상적인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몇 사람의 전임 교수들이 필요하였고, 그것이 바람직하였기에 그 방향으로 개선되기를 원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로 여건이 허락지 않아서 그냥 객원교수를 한 사람씩 청하여 강의하는 제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종국에는 그런 본격적인 교육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5년간의 러시아 선교를 마감하고 다시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우리 부부가 미국 영주권자였기 때문에 미국 귀환이 가능했다.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

모스크바 장신대 학장이라는 공직을 떠나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공직을 가지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남은 생애에 대한 계획을 세워야만 했다. 77세로 공직에서 물러났으니 사실 살만큼 산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남겨두신 시간이 얼마이든지 간에, 내 나름의 계획은 세워보기로 하고, 네 가지 프로젝트를 구상했다.


첫째는 신약성경 사역을 시도하자는 것이었다. 그 이유가 있다. 한국에서 성경번역 작업에 몇 차례 동참했지만, 그리고 주로 초역자의 책임을 지기는 했지만, 모두가 위원회를 거치는 작업이었기 때문에, 나의 사견을 고집할 수는 없었다. 내 나름으로는 내 해석이 꼭 맞는다고 보이는 것도 다수결로 정하다 보니 양보해야 하고, 아쉬움이 남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제안한 번역 원칙이 우리 장로교 총회에서 문제가 되어, 징계를 받은 일까지 있었지만, 여전히 내 원칙이 옳다고 보기에, 이제는 아무도 나를 제지하지 못하는 시점에 이르렀으므로, 숙원의 사역(私譯)을 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 도착하자 시작한 그 작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어, 2004년에 탈고되었고, 그 원고를 대한성서공회와 장신대 총장 고용수 박사께 보내며, 둘이서 상의하여 출판할 수 있으면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런데 성서공회 부총무인 민영진 박사는 고용수 총장을 협박하다시피 하면서 자기가 해야 한다고 고집을 했다. 그래서 나는 성서공회가 그것을 출판하리라고 기대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 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일 년 후에 서울에 나가서 민 박사와 김호용 총무를 만났더니 아무 말도 없이 그냥 출판을 못하겠다고 발을 빼는 것이었다. 나는 충분히 이해가 간다. 성서공회는 문자 그대로 여러 교단이 마음을 모아서 성경을 출판하는 기관인데, 나의 사역을 내는 일이 어찌 쉽겠는가 말이다. 총무들이 책임추궁을 당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약속을 묵살하고 만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나는 다시 장로회신학대하교 고용수 총장 후임인 김중은 박사더러 신학교 출판부 책임 하에 나의 신약성경 사역을 출판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OK했고, 신약학 교수들도 협력하겠다고 만장일치로 약속했다. 그래서 안심하고 기다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 김 총장이 못하겠다는 뜻을 전해왔다. 이사들의 승낙을 받아야 한다는 둥, 총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둥 핑계를 대며 발을 빼는 것이었다. 결국 나의 사역을 냄으로써 총장 자신의 진로에 어떤 지장이 있을 것을 염려하여, 그 출판 약속을 번복한 것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채운 교수를 통하여 예영수 박사 등과 의논한 끝에 여러 후원자들의 도움을 얻어서 2007년 5월에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008년 5월에 둘째 판이 인쇄되었다. 어쨌든 이렇게 해서 나의 첫째 계획이 이루어졌다. 고마울 뿐이다. 우선 신약성경 헬라어 원전을 최대한 정확하게 번역하려고 노력했다. 둘째는 “인자(人子)”를 “사람의 아들”로 번역했다. 셋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보통 사람의 말로 표현했다. 무조건 “해라”조로 하지 않고 보통사람이 하는 말투로 말씀하신 것으로 표현했다. 

 

 

 

전 장신대학장 박창환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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