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lliam A. Linton, 1891-1960 (Entering 1912)

연세대에'언더우드'가 있다면 한남대엔'린튼'이 있다

제91주년 3.1절을 맞아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는 윌리엄 린튼(한국명 인돈ㆍ1891~1960) 선교사는 한남대 설립자로서 근대 한국사회에 큰 기여를 했으나, 널리 알려진 언더우드 선교사와는 달리 상대적으로 아는 사람들이 적다. 특히 린튼 선교사는 한국의 독립을 위해 앞장선 대표적 선교사이다. 그의 특별한 한국 사랑은 후손들에게로 이어져 4대(代)에 걸쳐 한국에서 봉사하고 선교하며 한국 땅에 뼈를 묻은 후손들도 있다.

100년 가까이 이어진 린튼 가문과 한국과의 첫 인연은 바로 애족장이 추서된 윌리엄 린튼 목사가 1912년 대학을 갓 졸업한 21세의 나이에 미국 남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발을 디디면서 시작됐다. 그는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48년 동안 호남과 충청지역에서 선교 및 교육사업에 헌신했다. 군산영명학교에서는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한국말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고 전주신흥학교와 기전여학교 교장을 역임했다.

특히 그는 외국인이었지만 한국의 독립을 위해 투신했다. 린튼 선교사는 1919년 전북 군산의 만세시위 운동을 배후 지도하고, 3.1운동의 실상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지지를 호소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린튼 선교사는 3.1 만세운동 직후인 1919년 8월 미국 애틀랜타에서 열린 미국 남부지역 평신도대회에 참석, 한국의 처참한 실정과 독립운동의 비폭력 저항정신을 전했다. 또한 신흥학교 교장 당시에는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 학교를 자진 폐교해 1940년 일제로부터 추방됐다가 광복 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한국전쟁의 와중에 많은 선교사들이 해외로 피했으나 그는 '대피명령'이 떨어진 상황에서도 전주에 남아 성경학교를 운영했으며, 전쟁 막바지에는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계속하면서 한국 땅을 지켰다. 린튼 선교사는 말년에 암 투병을 하면서도 1956년 대전기독학관을 설립했고 59년 대전대학(현 한남대)으로 인가를 받아 초대학장에 취임했다. 병 치료도 미룬 채 한남대 설립에 매진했던 그는 1960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가 병원에 입원했으나 8월 숨졌다.

린튼 선교사의 각별했던 한국사랑은 가족과 후손들에게로 고스란히 이어졌다. 그는 한국에서 선교사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ㆍ1868-1925) 목사의 딸 샬롯(한국명 인사례)과 결혼, 아들 4명을 모두 한국에서 낳고 초등학교부터 고교까지 한국인들과 함께 교육을 받도록 했다. 아들 가운데 셋째 휴 린튼(한국명 인휴ㆍ1926~1984)과 넷째 드와이트 린튼(한국명 인도아ㆍ1927~ 2010)는 미국 유학을 마친 뒤 한국에 돌아와 선친의 뒤를 이어 호남에서 교육ㆍ의료봉사활동을 펼쳤다. 휴의 부인 베티(한국명 인애자ㆍ83)도 순천에서 결핵재활원을 운영하며 30년 이상 결핵퇴치사업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과 호암상을 받기도 했다. 현재는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머물고 있으며, 베티 여사의 집은 미국을 방문하는 북한 대표단이 머물다 가기도 하는 등 남북한 인사들의 사랑방 역할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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